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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류순(柳洵, 1441년 ~ 1517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희명(希明), 호는 노포(老圃),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5년 8월) |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일찍이 『금릉사 金陵詞』를 지었는데, 의미가 장중하고 건실해 널리 회자되었다.
1459년(세조 5) 생원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1462년(세조 8) 식년 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으며, 1466년(세조 12) 문과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1478년(성종 9)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서 도승지를 거쳐 시강관(侍講官)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시문에 능해 성종(成宗)의 총애가 돈독하였다.
1484년(성종 15)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오랫동안 관기 확립에 힘쓰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87년(성종 18) 천추사(千秋使)로서 명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호조참판·형조참판·공조참판·병조참판(兵曹參判)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 뒤 개성유수,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산역을 다스렸고, 1495년(연산군 1)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옮겨 대제학·산릉도감제조·동지경연사·판의금부사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吏曹判書)·도총관(都摠官)을 겸임한 뒤 우참찬·좌참찬·호조판서·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치다가 1498년(연산군 4)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고, 같은 해에 『성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압록강 연안에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계획이 있자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때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논해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左參贊)·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했으며, 1502년(연산군 8)에는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아,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505년(연산군 11) 65세의 나이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듬해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류순정(柳順汀)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수상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수차례 사임을 요청했지만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09년(중종 4) 연산조의 총신이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본인이 다시 사임을 요청, 마침내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514년(중종 9) 다시 영의정을 제수받아 국정을 총괄하다가 3년 뒤에 77세로 졸했다.
자학(字學)에 매우 정밀하고 의학·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남양 홍씨 계보 ; 12세기 홍관(이자겸의 난 당시 순절함)-홍지유-홍원중-홍사윤-홍진(류승의 장인)-홍규-명덕태후 홍씨(충숙왕비), 홍융-홍주(류만수의 장인), 홍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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