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사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897년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3년 일본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참전해 뤼순 공격에 참가하였다. 이후 야전직을 거쳐 1918년부터
소코가 쓴 《중조사실》과 미야케 간란이 쓴 《중흥감언》을 선물한 뒤 자살했다. 노기를 뒤이어 히로히토의 남은 초등과 2년 과정은 러일전쟁 때 활약한 해군 제독인 도고 헤이하치로와 해군대좌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자작이 가르치게 됐다. 초등과 과정을 마친 히로히토는 어학문소에서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가 앙탕트 코르디알(프랑스어: entente cordiale) 정책을 펴면서, 러일전쟁 이후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헌법에 의하여 1960년부터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2차 대전 후부터 1960년까지
웅게른슈테른베르크는 군에 입대하여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극동전선에 도착했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래서 전쟁에 제대로 종군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참전자로 취급되어 1913년 러일전쟁기념포장을 수훈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