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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1434년 ~ 1507년)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의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첫 부인이며,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친고모이다. 몸이 병약하여 강제 이혼당하였으나 영응대군은 그를 잊지 못하여 재결합했다. 그러나 남편 사후 군장사(窘長寺)의 중 학조와 간통하여 물의를 빚었다. 본관은 여산이다.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의 누이이다. 몸이 병약하여 강제 이혼당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다.[1] 그 뒤 영응대군은 재혼했지만 아내를 잊지 못하여 송씨의 사가에 찾아갔고 두 사람 사이에 두 딸이 태어났다.[2] 결국 단종 때 송씨는 영응대군과 재결합했다. 영응대군과의 사이에 아들을 여럿 낳았으나 모두 죽고 살아남은 것은 딸 길안현주 뿐이다.[3] 1479년 성종 대에 중전 윤씨가 폐위되자 어린 원자는 잠시 송씨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았다.[4][5]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승려 학조와 사통을 했다.[6][7]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6]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송씨의 성품이 질투심이 많고 사나워 영응대군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다가 나중에는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다.[8] 누군가에게 낡은 옷을 한 벌 주려해도 송씨의 허락이 필요했으며 허락없이는 주지 못했다고 한다.[8] 송씨는 평소 궁중에 자주 드나들면서 외명부 중에서도 각별히 총애를 받았는데 그 조카인 송영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송씨 덕분이었다.[9] 송영이 논핵을 당했을 때 그 처가 8촌 오라비 홍석보의 집을 찾아가 남편의 일을 청탁하며, 시고모인 송씨가 마음이 불편해 병이 났다고 전하자 윤은로 등이 송영을 탄핵하였다.[9] 그러나 성종은 이를 듣지 않고 윤은로 등을 벌하였다. 또한 송현수의 아들인 송거가 아버지의 죄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할 때 송씨는 조카의 과거 응시를 성종에게 부탁하기도 했다.[10]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과 연산군이 송씨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노비와 쌀, 베 등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등장한다.
승려 학조와의 간통 사건은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학조를 매우 혐오한 김종직은 이를 두고 경멸, 비판했는데, 김종직의 제자들 중 누군가 실록을 편찬할 때 송씨와 학조의 불륜 사실을 기사로 넣어서 문제가 됐고, 이는 무오사화까지 이어진다.
박경은 김일손과 기맥이 통하여 홍인문 밖에서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방문(榜文)을 보고 알렸다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는 바람에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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