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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의 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단천시(端川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의 북동쪽에 있는 도시이다.
단천시의 위치 | |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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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면적 | 2,170 km2 |
총인구 | 345,875[1] 명 (2008) |
동 | 39개 |
리 | 39개 |
동해에 접하고 남대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산지에 접해 있지만, 남쪽은 단천평야가 있다.
동쪽은 함경북도 김책시(대한민국에선 성진시),서쪽은 허천군과 덕성군,남쪽은 동해,북쪽은 량강도 김형권군이다.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았으며, 발해가 패망한 뒤에는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족의 땅이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족을 내쫓고 복주성(福州城)을 쌓았으나(동북 9성) 2년만에 성을 헐고 그 땅을 여진족에 반환하였다. 훗날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로써 기록에는 당시 독로올(禿魯兀)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고려사》).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이 반원정책을 시행하면서 쌍성 수복과 함께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우왕 8년(1381년)에 단주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이듬해 요심 초적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동왕 11년(1385년)에는 왜구가 침공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 7년(1398년) 지단주군사로 고쳤으며, 이 때에 '채리'로 아오, 상가사, 어파홍, 군대의 4곳이 설치되었다. 태종 9년에는 시리(실실리), 기원, 마곡 등 3개 역소가 설치되었고, 동왕 13년에 단천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세종 3년에 심합배역이 더 설치되었고, 31년에 읍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단천군수로 있던 강찬(姜燦)이 정문부의 의병에 호응해 거병하여 왜군을 몰아냈다. 숙종 31년에 이인엽(李寅燁)이 경연 석상에서 단천군수를 마천령(摩天嶺)을 맡은 방어사로 삼아 성진(城津), 길주(吉州)와 함께 수비하게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최석정(崔錫鼎)은 단천군수를 방어사로 삼을 필요 없이 단천과 길주가 함께 마천령을 지키고 안변과 회양이 함께 철령을 지키도록 하고, 평강 한 길은 두 도의 도신에게 물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주장하였다(《임하필기》).
단천시는 39동과 39리로 구성되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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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공업이 발달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은광이 유명하였으며, 청옥(靑玉)이 발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그네사이트나 코발트가 풍부하고 철광석도 채굴되는 등 지하자원이 많다. 마그네사이트는 룡양광산이나 대흥청년영웅광산 등에서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백금산(검덕, 옛 북두일면)일대에 매장된 마그네사이트는 해안가의 본시가지 (옛 단천읍)으로 옮겨져 가공한 뒤 수출된다. 검덕에서는 연-아연도 채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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