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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독트린(영어: Nixon Doctrine) 또는 괌 독트린(영어: Guam Doctrine)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정책이다.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 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하였다.[1] 공중공격이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 당사자들 자신이 저항·저지해야 된다는 입장을 선언한 이 원칙은 미국의 재래식 아시아 방위 개념을 전폭 수정한 것으로 1980년대까지 영향을 주었다.[2]
1969년 1월에 등장한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붕괴된 대외 정책에 대한 국내적 합의 기반을 다시 형성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새로운 대외 정책의 기조는 ‘미국의 정치적 및 군사적인 후퇴와 국제 체제에서의 미국의 적절한 조화가 가능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었다. 후에 닉슨 독트린으로 명명되는 괌 독트린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닉슨 독트린은 자신이 직면한 대내외적인 환경에 대한 미국의 인식상의 중대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인식의 변화란 냉전 전략을 수행함에 있어서 미국의 능력을 종래에 비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낮춘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국의 인식 전환은 냉전 수행의 두 축인 유럽과 동아시아에 대하여 미국이 이전과 같은 적극적 역할을 맡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역할의 후퇴 모색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의 상대적 하락도 수반하였다. 따라서 닉슨 행정부의 대아시아 정책은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와 보조적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괌 독트린 을 통하여 미국은 이렇게 변화된 대아시아 정책을 공개적으로 천명되었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백악관 수행기자단과 가진 기자회견을 통하여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자주국방능력 강화와 미국의 부담감축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 회견에서 닉슨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견지해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괌 독트린은 동아시아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라는 측면에서 한•미관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괌 독트린의 천명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에 대한 정책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of the Vietman War)’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이 정책은 동아시아 동맹국의 방위에 대하여 보다 축소된 역할을 모색한 것이었다. 더불어 이 정책은 미국의 역할 축소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도를 저하시키는 것을 방지코자 하는 고려 또한 반영한 것이었다. 상기한 두 가지 고려는 상호 딜레마의 관계에 있는 바, 미국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아시아의 각 동맹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규모의 감군을 기존 동맹국의 국방력의 증대와 연계시켜 추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추진을 베트남 전쟁에 일차적으로 적용시켰다. 즉 미국은 베트남으로부터 미국 지상군을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남베트남의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전략을 추진한 것이다.
베트남 정책에 대한 이러한 미국의 변화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도 같은 논리로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닉슨 독트린을 한국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닉슨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군과 한국 국방력의 증대를 병행추진 하였다. 나아가 이 논리는 한국안보의 한국화를 달성하는 지표로서 한국군의 역량 증대에 따라서 주한 미군의 추가 감군도 가능하다는 논리도 내포하였다. 따라서 괌 독트린 은 주한 미군의 감군 및 추가 감군을 둘러싸고 향후 전개되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4]
2016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국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는 1987년 12월 미국 공화당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백악관 벽에 걸어놓겠다고 말했다. 편지에서 닉슨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현재 닉슨 일가와 가까운 사이다. 닉슨 전 대통령의 손자 크리스토퍼는 2016년 11월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서 열린 트럼프의 추수감사절 행사에 참석했다.[5]
2016년 12월 20일, 워싱턴포스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과거 냉전 시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식의 미치광이 이론(the Madman Theory)을 외교전략에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6]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과거 닉슨이 그랬듯이 외교에서는 상대국가가 예측하지 못하는 비합리성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유리한데, 트럼프는 닉슨보다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분석했다.[7]
전직 CIA 요원인 폴 필러는 "트럼프는 (CIA에 대한) 복수를 감행할 것"이라며 "트럼프는 CIA와 극심한 갈등을 벌였던 리처드 닉슨보다 더한 보복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CIA가 보고하는 일일 안보브리핑에 관심이 없다. 대신 부통령 당선자인 마이크 펜스가 브리핑을 듣는다. CIA가 불만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다. CIA는 선거기간 중에도 "러시아가 트럼프를 도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거를 내놓지는 못했다.[8]
1970년대 한국은 닉슨 독트린 등 미국 공화당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새로운 외교정책에 크게 당황했었다. 제2의 닉슨 쇼크가 한국에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닉슨 쇼크는 지난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경상수지 악화를 막기 위해 대부분의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추가로 매기고 금태환제를 폐지해 세계 경제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수출 증가율은 10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경제적 충격은 1972년 사상 초유의 ‘8·3 사채동결 조치’로 연결됐다.[9]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닉슨 독트린 때문이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주둔했던 주한미군 7사단 2만여명이 일방적으로 철수했으며, 당황한 박정희 정부가 독자 핵무장을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닉슨과 개인적으로 친하며, 닉슨의 보좌관을 대선 캠프에서 채용했으며, 닉슨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외교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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