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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어: Nicolae Ceauşescu 니콜라에 체아우셰스쿠[*], IPA: [nikoˈla.e t͡ʃe̯awˈʃesku], 문화어: 니꼴라에 챠우쉐스꾸, 1918년 1월 26일 ~ 1989년 12월 25일)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65년 3월 28일부터 1989년 12월 22일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원수이자 국가주석직을 역임했으며 1989년 12월 22일에 자신의 정권이 무너지자 도주를 시도하다가 군인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루마니아 왕국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부농의 아들(빈민농가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음[1])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이주하여 구두 수선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1932년 당시 불법 정당이었던 루마니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는 활약하였으며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낙인찍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소 이후 그는 1939년에 섬유 공장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 페트레스쿠를 만났으며 1946년에 결혼한다.
1940년 다시 투옥된 차우셰스쿠는 1943년 트르구지우(Târgu Jiu) 강제수용소로 옮겨 수감되었고 철도원 출신 공산주의 운동가인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 1901년-1965년)와 같은 감방을 쓰게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은 이후 그는 대통령 신분으로 정권을 차지했으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루마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의 간섭권에 들어갈 때 그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공산청년연합 서기관을 지냈다.
1947년 루마니아 공산당이 권력을 차지한 데 이어서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자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스탈린주의 정권하에서 여러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했다는 사실은 루마니아 정부의 언론 통제로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위에 오르게 된다.
1965년 3월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 이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받았으며 1967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된다. 차우셰스쿠는 집권 초기 소련의 공산권 간섭에 맞서는 독자 노선으로 서방 국가들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활동을 사실상 중단시켰으며(형식적인 참여에 그침) 1968년에는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개 비판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은 루마니아가 곧 산유국이며, 소련에 의존하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외화 획득이나 에너지 자원 확보의 가능성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에 감명을 받았다. 루마니아로 돌아온 그는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상화하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체사상에 관한 서적은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어 보급되었다. 또한 문화 대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가 획일화된 모습에도 영향을 받았다.[2]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 세계와도 접근하여 1968년 소련을 공개 비판한 그 이듬해인 1969년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가졌고 미국과 서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직분에 대통령직을 추가하여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차우셰스쿠는 외교 정책으로는 중소 분쟁 때 중화인민공화국과 옛 소비에트 연방 중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었지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화에는 탄압하였다. 그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 정치를 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어버이 수령"이나 "민족의 태양"으로 인식하게 해 인민에게 존경받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의 방식을 모방해 "지도자"(루마니아어: Conducător 콘두커토르[*])·"카르파티아산맥의 천재"(루마니아어: Geniul din Carpaţi)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을 개인 숭배 대상으로 발달하게 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의 독재 방식을 루마니아 국민에게 적용한 것은 중대한 실수로 여겨진다. 자신을 "어버이 수령"으로 인식하게 해 권력을 유지한 김일성의 왕조스러운 독재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유교 사상에 익숙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제한스러우나마 민주주의 경험이 있었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문화가 비교적 강한 루마니아인들에게 이와 같은 독재 방법은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때 보천보전투 등에서 독립투쟁의 공로를 세운 전설적인 영웅으로 알려져 조선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의 반일 감정 등을 바탕으로 하여 성공적인 숭배로 이어졌지만, 차우셰스쿠는 김일성과 같은 민족 전설이 없었다.
차우셰스쿠는 동구권 국가인 루마니아 국가원수였지만, 서구권 국가와의 외교도 전개했다. 특히 차우셰스쿠는 1975년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 일본에 체류했고[3][4] 4월 4일에는 쇼와 천황과 회담했는데 이것은 "1945년 이전 독재자"(쇼와 천황)와 "1945년 이후 독재자"(차우셰스쿠)의 대면이었다. 4월 5일에는 일본 총리대신 미키 다케오와 회담했다. 쇼와 천황과 차우셰스쿠 모두 1989년에 죽었지만, 이들의 최후는 정반대 길을 걷는다.
차우셰스쿠는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를 만난 적 있고 콜롬비아의 대통령인 미사엘 파스트라나(Misael Pastrana)를 만난 적도 있었으며, 미합중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만나기도 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당시에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황제인 장베델 보카사를 만나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고위 관리 이온 미하이 파체파(Ion Mihai Pacepa)가 서방으로 망명한 후 자신을 배신할까 봐 두려워했고 이에 배우자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비롯한 자신의 일가족은 물론 자신의 처가 식구들까지 행정부 요직에 앉히는 족벌 정치를 하였다. 엘레나는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순위(공산당 간부 감독)였다. 엘레나의 형제들도 요직에 있었는데 오빠 마린(Marin, 1916년 ~ 1989년 12월 28일)은 빈 주재 루마니아 경제국장을 맡았고 남동생 안드루타(Nicolae Andruță, 1924년 ~ 2000년)는 비밀경찰 총책임자를 맡았으며 다른 남동생 일리에(Ilie, 1926년 6월 8일 ~ 2002년 10월 1일)는 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차우셰스쿠의 차남[5] 니쿠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권력 후계자로서 간주되어 왕자로서 군림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며느리를 학생 친위대 책임자로 앉히는 등 일가친척 사십여 명을 루마니아 행정부와 루마니아 공산당 요직에 임명하는 족벌 정치를 벌였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자신도 루마니아사회주의공화국 대통령, 루마니아공산당 서기장, 국가평의회장, 군 통수권자, 국방위원회장, 공산당이념위원회장, 공산주의통일전선장, 경제사회개발최고회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한손에 권력을 쥐고 있었다.
차우셰스쿠의 정치는 심각한 공포 정치로 여겨졌다. 특히 도청을 통한 불만세력 색출을 통해 국민들을 행동과 말 모두 통제했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인구 2,000만명이었는데 각 도시 및 마을에 300만 개의 도청기와 1,000여 개의 도청 센터가 설치될 정도로 빈틈없는 감시 때문에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 조차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린이들의 동심(童心)을 국민 감시에 악용하기까지 했는데[2]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학부모가 한 이야기를 토론 수업을 빙자해서 수집하기까지도 하였다. 물론 그가 수집된 이야기 중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담긴 내용은 상부에 보고되었으니 상당히 교묘한 감시 방법이었다.
또한 그는 세쿠리타테라고 불리는 친위조직을 두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차우셰스쿠의 충복(忠僕)인데, 차우셰스쿠는 고아 출신인 세쿠리타테 요원들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자신의 친위조직으로 만들었다. 세쿠리타테 요원들은 암살,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맡고 있어서 차우셰스쿠의 독재정권이 유지되게 한 밑바탕 중 하나였으며 정규군 장군들 못지않은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세쿠리타테는 크게 비밀경찰과 보안군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들 중 비밀경찰은 정보수집과 암살을 담당했다.
다른 국가에서는 정규군이 우세했지만, 루마니아의 경우는 세쿠리타테가 우세했다. 가장 큰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정규군에 대해 거의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 그는 루마니아 정규군은 전혀 신뢰하지 않고, 차우셰스쿠의 충복들 중 자신의 지지자만 뽑아다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보안군을 조직했다. 친위군 역할을 맡던 보안군들에게는 정규군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최신 장비와 높은 보수가 주어졌다.
이러한 원인은 훗날 반정부 시위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는 보안군과 이에 맞서는 정규군과의 대립이 드러나 내전의 위기로 번졌다. 민주화 이후에도 보안군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고, 이들을 뿌리뽑고자 하는 데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출처 필요]
풍족한 농업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현실을 무시한 차우셰스쿠의 무리한 공업화로 인해서 경제가 파멸하여 1980년대에는 무려 111억 달러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엄청나게 불어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산물과 공산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수입을 규제하는 정책을 병행했다. 그리하여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지기 얼마 전인 1989년 여름에 부채는 깨끗이 갚을 수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어 식량은 배급되어야 했고 수도와 가스, 전기 공급이 수시로 중단되었으며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꾸준히 하락하였다. 게다가 당시 개혁·개방을 내걸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와는 다르게, 그는 여전히 폐쇄적인 정책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도 더 심해졌다.
차우셰스쿠는 경제파탄을 국민에게 숨기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전포스터를 제작한다.
"경제 파탄이라구요? 웃기고 있네요. 우리 식료품 가게에는 유기농 식료품으로 가득하답니다."
하지만, 1989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경제정책 실패로 경제가 파탄난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국영 방송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차우셰스쿠가 식품으로 꽉 찬 가게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통치 아래 높아진 생활 수준을 찬양하는 내용을 보도하는 체제선전 보도를 하였으나, 식품가게의 진열장은 텅텅 비고, 사람들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모습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농산물 대량수출과 수입규제로 굶주리는 대중들의 삶과는 달리 차우셰스쿠는 일명 차우셰스쿠궁이라고 불리며 카펫이 1,500장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았던 '인민 궁전'을 세우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6]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거주지 확장을 목적으로 이른바 '차우셰스쿠 궁전'이라 불리는 궁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완공 당시 그는 이미 사망했다.
차우셰스쿠의 호화로운 궁전 건설로 강제철거가 시행되어, 민중들의 주거권이 짓밞혀졌다고 전해졌으며, 건축가도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만들기보다는 차우셰스쿠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7]
서방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재를 강행해 온 차우셰스쿠 일가의 통치는 영원할 듯했지만, 루마니아에서 차우세스쿠 독재에 저항하는 자유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20일 차우셰스쿠는 인민궁전 앞 광장에서 관제 친정부 집회를 개최한 일변, 공장에서는 열성분자들을 선발해 아침 일찍 광장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집회가 돌연 취소됐으니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 정오에 모일 것을 재명령했으나 열성분자들은 퇴근한 뒤였고 어쩔 수 없이 당성이 약한 노동자들을 선발할 수 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와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자유민주화 운동과 유혈 진압을 시작으로 붕괴했다. 티미쇼아라에서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소수 민족 차별에 반대하면서 자유민주화 운동을 지도하던 퇴케시 라슬로(László Tőkés, 1952년 - ) 목사(라즐로 토케스 목사라고도 한다.)를 체포한 사건에 대항해 1989년 12월 17일 헝가리 개신교 신도가 시작한 시위는 루마니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더 포괄스러운 반정부 시위로 변했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낸 국가폭력으로 인민의 인권을 짓밞았다.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하였다.
12월 21일 12시 30분, 차우셰스쿠는 시위 사태를 진정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지하는 관제 대회를 열어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대중 10만명을 모이게 하고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연설의 내용은 경제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을 지지를 해야하는 이유뿐인 내용에 불과했는데 이 관제 대회에서 뒤쪽 끝에 있는 젊은 시위대가 갑자기 야유하자 앞에 있는 군중이 조금씩 야유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모든 군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야유한다. 차우셰스쿠는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했지만, 이 장면까지 전부 생중계되고 말았다. 얼마 못가 대중은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돌변하였고 차우셰스쿠 내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중앙위원회 건물로 대피하였다.
차우셰스쿠는 경찰만으로는 안 될 듯하다고 판단해 정규군을 출동하게 했으나 그 정규군은 오히려 시위대에 가담한다. 원인은 차우셰스쿠가 평소에 세쿠리타테만 편애했기에 반대파인 군부는 불만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이 시위를 기회로 차우셰스쿠와 세쿠리타테파를 없앨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군부는 시민이 아닌 차우셰스쿠가에 총부리를 겨눈 데다가 차우셰스쿠의 족벌 정치로 말미암아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루마니아 공산당원들마저 차우셰스쿠를 공산당에서 제명했고 국민과 군경이 하나가 되어 차우셰스쿠에게 재판받을 것을 통지한다.
차우셰스쿠는 세쿠리타테로 하여금 시위대를 막으라고 지시한 결과 광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군중이 군경과 충돌,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장군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왼쪽 다리에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까지 국방장관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바실리 밀레아가 국민에게 발포하라는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세쿠리타테에게 암살당했고 루마니아 공산당 내부의 권력 서열 2위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에게 적극으로 추천받으면서 국방장관이 되고 만다.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는 루마니아 전역으로 번졌다. 극도의 혼란 속에 시위 이튿날인 12월 22일 정부군과 경찰이 루마니아 인민의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결성된 구국 전선은 방송국과 수도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차우셰스쿠 친위대인 세쿠리타테와 시가전을 벌였다. 세쿠리타테는 시위대에 굴복, 중앙위원회 건물의 보호를 포기했다. 당시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돕지 말고 부대에 복귀하라고 군대에 명령했지만,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군인들의 민주화 시위 가담을 묵인했기에 군인들이 시위대에 대거 참여해 시위대 규모는 기하급수로 커졌으며 시위대에 가담한 군인 중에는 대령급 이상 고급군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기 편을 들지 않는다는 형편을 인지한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슈티에서 탈출해 성난 대중을 일단 피했다. 당시 이들 부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차우셰스쿠가 탄 헬기를 조종하던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서 대공 사격을 당한다고 거짓말하면서 헬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에서 내리고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원대로 복귀했다. 헬기로 도망할 수 없게 된 차우셰스쿠는 운전수에게 도주하라고 지시했지만 운전사는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 엔진이 타 버렸다고 거짓말해 차우셰스쿠를 내리게 했고 두 번째로 차우셰스쿠를 태워 준 운전사는 차우셰스쿠 부부를 농업박물관으로 몰래 보냈다. 농업박물관 근처에 살던 한 농민은 차우셰스쿠가 기거하던 방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서 혁명 군경에 밀고하여 차우셰스쿠 부부는 12월 23일 혁명 군경에 붙잡혔으며 군사법원에 넘겨졌다.
혁명정부 측은 그 전부터 차우셰스쿠 부부를 상대로 한 재판을 논의하고 있었으나 "잘못되면 차우셰스쿠 지지자들이 역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2월 25일 구국전선의 군사 법정에서 인민재판으로써 반역과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8]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마저 검사로 돌변해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의 예는 처음이오.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말할 정도였는데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을 배려해 사력을 다했다고 우겨서 재판장에게도 크게 미움을 샀다. 한편 소총수들은 차우셰스쿠를 죽이고자 총을 준비했고 차우셰스쿠의 처형에 동참할 사람들을 뽑기로 했는데, 지원자는 수백명에 이르렀으나 Captain Ionel Boeru, Sergeant-Major Georghin Octavian, Dorin-Marian Cîrlan 이 세명의 군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다. 이 3명의 군인들은 총 6정 총알 180발을 준비해서 '우리 그 인간 후려 갈겨버리자며'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군인들 소속 부대들도 총 6정 180발을 준비하는 걸 막거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둘은 눈물을 흘리더니 벽을 보고 "반역자들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더니 사형 집행이 시작되자 공산 세력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하지만, 일 절이 채 끝나지도 않아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고 총탄 각각 160여 발을 맞고 처참하게 죽었다.[2]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 장면은 공개로 이루어졌고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사형 집행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공동묘지 구석에 처박힌 채 묻혔다. 원칙상 유럽식 무덤은 대리석으로 만들고 장식까지 하지만,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은 그냥 흙으로만 대충 만들었다. 그 주변에는 잡초와 나무만 가득할 뿐이다. 비석도 당장 세워지지 않았는 데다가 함께 묻히는 것도 불허돼서 50m쯤 떨어진 각자 무덤에 매장됐으며,[6] 차남 니쿠 차우셰스쿠도 공산 체제 붕괴 후 병사했으나 차우셰스쿠의 묘지는 2010년 친자 확인 소송 문제로 말미암아 파헤쳐졌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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