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AI tools
대한민국의 고용노동부 장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김문수(金文洙, 1951년 8월 27일~)는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자 제10대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제15·16·17대 국회의원과 제32·33대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195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3][4] 중학교 동창으로 삼성전자 CEO를 역임하고 제4대 지방선거에서 상대했던 진대제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 시위를 하다 제적되었다가 겨우 복적돼 정상적으로 대학입시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1970년 초 그는 대학 내 모임인 후진국 사회연구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5] 같은 해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이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5] 그 뒤 서울대생에서 김근태와 함께 서울 구로구 구로공단에[5] 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위장 취업노동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6] 구로공단 위장취업 시절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당시 노동계몽운동을 하던 고대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만나 그로부터 마산수출자유지역, 영등포공장 이야기 등 언론에 보도되지 않던 비화 등을 접하며 한국노동계의 현실을 체험하였다.[5]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구로공단 위장취업 당시 그는 오전에는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저녁에는 사람들과 만나 담론 토론으로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5]
1971년 10월 15일에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 관련해 제적됐다. 1971년부터 72년까지 고향 경북 영천에서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을 했으며, 1974년에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제적됐다. 이후 1994년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입학 후 25년 만에 뒤늦게 졸업했다.
병역과 관련해서는 1971년 수배 생활 중 강제징집되었다가 중이염을 이유로 군 면제를 받아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7]
대학교에서 제적된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74년에는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근무했으며,[4] 그는 여러 공장에 다니며 직공으로 일했으며[6], 그 뒤 그는 염색공장에 취직하여 근무하기도 하였고[8] 청계천 피복공장에 입사하여 재단 보조공으로 일하기도 했다.[6]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도 고학으로 1977년에는 환경관리기사 2급, 안전관리기사 2급 등의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했다. 1978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고,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회사는 노조해산 정책을 추진하여 그는 노동조합 위원장직을 그만두게 되고, 회사에서도 해고당하였다.[9] 이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9] 그러나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체포, 연행되었다. 곧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후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서대문구치소 수감중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다시 한일 도루코로 복직하게 되었다. 1981년 여성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한 때 도피생활 중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던 구로2공단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지낸 설난영과 결혼하였다.[4]
1980년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구속 후 고문 받고 수감 중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한일도루코에 복직하였다. 1984년 방용석 등과 함께 '한국노동자복지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서 만난 안선모 등을 출판사 등에 주선해주기도 하였다.[10] 그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에 피선되고[4] 1985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6] 이후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당시 이소선에 대하여 '지혜와 뱃심, 부드러움과 투쟁성, 운동과 생활, 어머니와 투사가 한 몸에 결합'이라며 그를 두번 낳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11]
1985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서노련)이 출범하자 그는 심상정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서노련 지도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12] 1986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인천시 5ㆍ3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가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그는, 성장에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며 '좌파적 노동관'을 버리고 온건론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12]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6] 그 뒤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국구 3번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92년 노동인권회관의 소장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에는 한국노동연구원 현대자동차 노사관계진단팀장에 임명됐다.[4]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김문수는 민주자유당 경기도 부천소사구지구당 조직책이 되었다. 같은 해 노동부 행정규제완화위원회 위원과 노동인권회관 이사에 선출되었고[4] 1996년 신한국당 공천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서 출마하여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현실주의를 내세운 노동자 권익 향상을 추진하기도 했다.[12] 그 뒤 민주자유당이 김영삼 체제에서 이회창 체제로 바뀌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고, 1996년부터 1년간 신한국당 대표최고의원 특별보좌관을 수행하기도 하였다.[4]
1998년부터 1년간 야당의원으로는 특별히 대통령 자문기구인 노사정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4]
1998년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 한나라당 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대중 정권 대북 뒷거래 진상조사위원회 특별위원장을 맡으며 대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2000년 시민단체인 희망을 여는 정치연대의 간사로 활동했고, 2000년 6월 근로기준법을 재개정에 찬성하였다. 이어 노동부는 별도의 예산을 확보해 이들의 노동 실태파악에 나서야 한다고 하였으며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자 스스로의 끊임없는 권리 찾기 운동이 이어져야 한다며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13] 2001년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2003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거쳐[6] 2004년 2월에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14]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김용갑 등을 선발하기도 했다. 다른 의원과 내외부로부터 김용갑을 자를 수만 있다면 한나라당의 개혁성을 인정해주마, 다른 인사 수십 명을 자르고도 그를 자르지 못한다면 인정 못한다는 압력을 받았지만 김문수는 김용갑을 선택했다 한다.[14] 이 때 "돈 싸 가지고 오는 사람을 제일 먼저 탈락시켰다."며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제16·17대 국회의원에 계속하여 당선되었고, 2002년 17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직을 맡았을 때 당대표를 지냈던 최병렬 등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기도 했다. 후보경선에서 낙천자들로부터 견재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6] 2004년 1월 총선에서는 노동계에 있다가 전향한 그에게 한은 노조위원장 출신인 심일선(沈一善)의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15]
국회의원 시절에는 노동분야와 환경, 수도권 교통과 아동보육 분야에 관심을 갖고 많은 의정 활동을 벌였으며, 정권 부패 척결과 북한 인권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6년 녹색정치인상을, 1998년 한국유권자운동연합으로부터 국회의정활동 환경노동위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 결식아동돕기 의정활동 공로패와 전국 보육시설협회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 당시 “결식아동에게 밥을 줄 책임이 국가에 있는데 왜 예산을 배정하지 않아 성금에 의존토록 하느냐?”라고 항의하기도 하여 “김결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6]
이후 16·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3선 국회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 등을 맡았으며, 2000년 밝은 정치 시민연합 새천년 밝은 정치인상을 수상했고, 2005년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에는 국회출입기자단으로부터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와 일 잘 하는 국회의원 1위에 선정된 바 있다.
2006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사임한 후, 2006년 4월 지방자치단체장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2006년 7월 1일 경기도 민선 4기 도지사에 취임했다. 2006년부터 2008년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다.[17] 2007년 4월 수도권 규제 완화와 경기지역 개발을 주장하기도 했다.[6]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2009년 한국메니페스토운동본부에서 평가하는 공약 이행도 평가에서 1위를 차지(공약이행 2년차 목표달성 최우수, 주민소통-민관협력 최우수, 웹소통 최우수 평가)했다.
2009년 12월 2일 하루 전인 1일 경기도의회 교육위원회가 경기도교육청이 제출한 무상급식 예산 650억 원을 삭감하자, 그에 대해 김문수 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6]
학교는 밥도 중요하지만 선생님이 제일 중요하다. 학교는 무료급식소가 아니다. 훌륭한 선생님 모시기, 과학기자재 구입 등에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해 써야 하는데, 온통 무료급식해서 밥 먹이고 치우자고 한다. 이게 대표적인 포퓰리즘이다.
한편 오마이뉴스 등의 언론에서는 김문수 지사의 발언에 대해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라고 밝힌 헌법 31조도 포퓰리즘이냐?”라고 비판했다.
2009년 1월 2일 부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안 되고 전쟁이 없었고 통일이 됐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본질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중 언론이 일부만 인용하여 논란을 빚었다.[18]
2010년 1월 7일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정부가 제시한 '세종시 수정안'의 특혜논란을 일고있는 인센티브내용들이 역차별을 부른다며 비판했다.[19]
2010년 5월 20일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본인의 지지율이 2위로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아시아경제> <폴리뉴스>와 여론조사업체 '모노리서치'를 검찰에 고발했다. 김문수 후보측은 자신의 지지율이 낮게 나온 여론조사 결과는 편파조사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20]
2010년 5월 29일 6.2 지방선거를 위한 유세를 위해 대학생들과 간담을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했다. "국민에게 큰 불편을 끼치며 촛불집회에 나섰던 이들은 사과를 해야 한다.",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워야 한다."[21]
2010년 6월 8일 김문수는 8일 4대강사업에 대해 "다른 지역에서 안 하면 경기도에서 다 하겠다."고 발언했다. 김문수는 이날 오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단현리에 있는 한강 살리기 6공구 현장에서 '한강 살리기 사업 추진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다른 지역에서 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지 모르겠다."며 이같이 말했다.[22]
김문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해왔다. 2010년 9월에는 ""청와대라는 데가 구중궁궐이지 않습니까?"라며 "각종 보고서를 많이 받겠지만, 그 보고서라는 것하고 현실은 굉장히 다르다."라며 소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명박의 독주에 대해서 "리더십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될 때 대통령 본인이 불행해진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23] 그러나 2010년 11월 22일에는 "세종대왕, 박정희를 다 합쳐도 이명박 대통령이 역대 최고의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했다.[24]
김문수는 "하이닉스에서 나오는 구리 양보다도 특전사 6,700명의 군인이 와서 팔당호를 오염을 시키는 것이 더 심각하다.", "군사시설은 군사보호지역이 늘어나는 혐오시설이라서 주민들이 받기를 원치 않는다." 등 진심으로 군대에 적대감을 표한 군대 폄하 발언을 해서 당시 이치범 환경부 장관은 또 “군부대가 환경오염이 더 크다는 게 어떤 근거인지 모르겠다.”고 김문수 도지사의 발언에 우려를 표했고[25] 국방부는 장병들이 혐오스럽냐고 되물어 김문수 도지사의 사죄를 촉구했다.[26]
2010년 11월 2일 서울대 법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김 지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치켜세운 걸 두고 한 학생이 “민주주의란 권력자가 독단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체제다. 국민을 설득해 이끌어내는 게 지도자의 요건 아니겠느냐?”고 묻자 김문수 지사는 “민주주의만 외치면 모든 게 정당화되느냐. 배고픈 사람에게 민주주의가 밥을 주진 않는다.”고 답했다.[27]
2010년 11월 김문수의 대학특강과 실·국장회의에서의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김문수는 걸그룹 소녀시대에 대해 젊은이들과 공감하는 차원에서 "내가 봐도 잘생겼다. 쭉쭉빵빵이다."라고 농담하였다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문수는 유감을 표명할 사안이 아니라며 당시 논란을 삼았던 언론에 해명했다.[28]
2011년 그는 "한나라당이 정당의 이념과 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써 선진화를 가로막는 좌파의식, 포퓰리즘이 연탄가스처럼 국가와 국민을 오염시켰다."라고 발언했다.[29] 경기도에 따르면 김문수 지사는 2010년 7월 자신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11개월 동안 모두 62차례 외부특강을 가졌다고 한다. 한 달에 5,6회 꼴로, 매주 1차례 이상씩 외부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까지 '대한민국의 미래, 경기도'였던 특강 주제도 올 들어서는 '통일 강대국, 대한민국을 만들자'로 바꿨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 등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도정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철학과 소신을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한 김 지사는 특강 뒤 50만~100만원에 이르는 강사료도 일부 받아 온 것으로 확인됐다.[30] 2011년 6월 김문수는 대한민국의 소설 춘향전에 대해 "춘향전이 뭡니까?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31] 이후 김문수의 미니홈피에는 댓글이 올랐다.[32] 이어 6월 30일에는 "여성들의 활동의 폭이 남자보다 좁다."고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33]
2012년 4월 16일 수원 광교신도시로 이전 계획이었던, 경기도청이 이전보류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김문수는 16일 "세수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부동산 관련 세금이 줄고 있고, 부동산 침체도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재정이 걱정"이라며 "지금은 비상경영체제로, 수천억원이 드는 신청사 이전사업은 일단 스톱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광교신도시 입주예정자 및 입주자 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전보류 발표시기와 대선 출마를 위한 경기도지사 사퇴 발표시기와 관련하여 비대위는 "김 지사는 지난 지방선거와 연말 대선을 앞두고 도청 광교신도시 이전 계획을 두 번씩이나 보류하는 등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며 2012년 5월 15일 주민 3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경기도청앞 광장에서 광교신도시 도청이전을 촉구하는 규탄 집회를 열고 강하게 반발 하였다.[34]
2014년 6월 30일에 경기지사의 임기를 마치고 9월에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 및 오찬간담회를 잇따라 갖고 “국민이 지금 바라는 것은 ‘정치 좀 바꿔라. 여의도 좀 바꿔라. 그리고 먹고살게 좀 해줘라. 희망을 좀 달라.’ 저는 이렇게 듣고 있다”며 “저보고 헌법을 바꿔 달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못봤다.”고 밝혔다.
“4·19 때 내각제 개헌을 했다가 1년도 안 돼 쿠데타를 불러왔다.”며 “66년간 9번의 헌법이 변하는 역사 속에서 많은 교훈과 경험이 있었다. 그걸 잊어버리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개헌 문제를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갈등 양상을 보인 것과 관련해 “대통령 생각이나 대표 생각이나 모든 부분이 잘 화합해서 국민의 요구를 잘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저는 믿는다.”고 말했다.
2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국포럼 2014년’ 특강에서도 개헌론과 관련해 “5년 단임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통령보다 국회의원들이 더 욕을 먹는 현실에서 의원들이 뽑는 총리, 장관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 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그는 ‘국회의원 무노동 무임금 등 혁신특위 개혁안에 당내 반발이 있고 김 위원장이 당내 개헌주장 여론과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국민이 기준이다. 민심이 당심을 우선한다고 본다.”며 “민위천(民爲天), 국민이 하늘이고, 식위천(食爲天), 국민이 먹고사는 경제가 하늘이다. 민심을 앞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보수정당 계열의 성지로 꼽혔던 대구의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당선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탄핵 반대 의견을 적극 피력하였다.[35]
2018년 7회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 결과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김문수 후보는 23.34%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 3위는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이다.
2019년 들어 문재인 대통령 퇴진 운동에 자주 참석하고 있다. 같은 해에 조국 사태가 터지자 삭발식을 단행하였다.[36]
2020년 1월 31일 자유통일당을 창립하고, 당대표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화문 집회세력을 규합하고, 총선에 대비해 자유우파적 가치를 내세울 전망이다.[37]
이후 3월 3일 우리공화당과 통합하여 자유공화당이 되었다. 그러나 공관위의 구성비율과 비례대표 공천을 놓고 조원진계와 극심한 갈등 끝에 탈당했고, 기독자유통일당에 합류했다.
2021년 3월 18일 김무성, 이재오와 함께 서울시장 야권 후보 단일화와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38]
2024년 7월 31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8월 26일에 인사청문회가 진행되었고 야당이 거부하는 가운데 대통령의 재가로 장관에 임명되었다.“사도광산 강제동원이냐” 묻자…김문수 “공부 안 해서 모르겠다”로 논란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선조 국적 일본’ 입장 재차 고수 하였다. [40][41][42]
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
1992년 | 총선 | 14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중당 | 319,041 표 |
|
전국구 3번 | 낙선 | |||
1996년 | 총선 | 15대 | 국회의원 | 경기 부천시 소사구 | 신한국당 | 33,446 표 |
|
1위 | 초선 | |||
2000년 | 총선 | 16대 | 국회의원 | 경기 부천시 소사구 | 한나라당 | 47,101 표 |
|
1위 | 재선 | |||
2004년 | 총선 | 17대 | 국회의원 | 경기 부천시 소사구 | 한나라당 | 50,418 표 |
|
1위 | 3선 | |||
2006년 | 지방 선거 | 33대 | 도지사 | 경기도 | 한나라당 | 2,181,677 표 |
|
1위 | 초선, 민선 4기 | |||
2010년 | 지방 선거 | 34대 | 도지사 | 경기도 | 한나라당 | 2,271,492 표 |
|
1위 | 재선, 민선 5기 | |||
2016년 | 총선 | 20대 | 국회의원 | 대구 수성구 갑 | 새누리당 | 51,375 표 |
|
2위 | 낙선 | |||
2018년 | 지방 선거 | 37대 | 시장 | 서울특별시 | 자유한국당 | 1,158,487 표 |
|
2위 | 낙선 | 민선 7기 |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Every time you click a link to Wikipedia, Wiktionary or Wikiquote in your browser's search results, it will show the modern Wikiwand interface.
Wikiwand extension is a five stars, simple, with minimum permission required to keep your browsing private, safe and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