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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권단(權㫜, 1228년~1311년 12월 1일)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菴), 본관은 안동이다.
권위(權韙)의 아들이다. 장단현위(長湍縣尉)로 벼슬을 시작해 인주판관(仁州判官),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을 거쳤다.[1]
이후 속세를 등지고 불문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아버지 권위(權韙)의 강한 만류로 1254년(고종 41) 문하녹사(門下錄事)로 부임했다.
같은 해 6월 류경(柳璥)의 권유로 문과에 응시했다가 급제했으며, 윤6월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로 옮겼다.
이후 예주(禮州)·승주(昇州)·맹주(孟州)·개주(价州) 등 네 주의 부사(副使)를 거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부임했는데, 이때 능라(綾羅)를 거두들이고 저장하는 창고인 갑방(甲坊)을 철폐하고 1년 동안의 공물을 3년 동안 나누어 지출했으며, 사호(司戶) 중 백성의 조세를 도적질하는 자가 있으면 뜰에서 그 자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2]
1270년(원종 11)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재직 중 삼별초(三別抄)가 제주(濟州)에 침입하자 영광부사(靈光副使) 김수(金須)와 장군(將軍) 고여림(高汝霖)을 차례로 보냈으나, 제주는 끝내 함락되었다.[3]
1272년(원종 13)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원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가 돌아왔으며[4], 1278년(충렬왕 4) 국자좨주(國子祭酒)·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서 전라도계점사(全羅道計點使)로 나갔다.[5]
이듬해 진주목부사(晉州牧副使) 최참(崔旵)과 함께 파직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부임했을 때 백성을 위해 능라의 값을 깎은 것 때문이었다.
이후 복직되어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 옮겼으며, 1284년(충렬왕 10) 문과를 주관했는데, 조선열(趙宣烈)·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백이정(白頤正) 등 36명에게 급제를 하사했다.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다가 1287년(충렬왕 13) 8월 좌부승지(左副承旨), 12월 밀직학사(密直學士)·판도판서(版圖判書)·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 이듬해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289년(충렬왕 15)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동수국사(同修國史)로 치사했다.
1294년(충렬왕 20)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판판도사사(判版啚司事)로 다시 치사했으며, 1301년(충렬왕 27) 수문전대사학(修文殿大司)·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에 제수되었다.[1]
말년에 중국 강남(江南)의 승려 소경(紹瓊)이 바다를 건너 고려로 오자 선흥사(禪興社)의 승려가 되었으며, 1311년(충선왕 3) 향년 84세로 졸했다.[2]
이듬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판선부사(判選部事)에 추증되고 특별히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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