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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전투찬가〉(共和國戰鬪讚歌, 영어: "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는 미국의 줄리아 워드 하우가 남북전쟁 시기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노래인 〈존 브라운의 시체〉의 가사를 다듬어 작곡한 노래이다. 가사는 줄리아 워드 하우가 붙였다.[1] 1861년 11월에 작곡되었고, 1862년 월간지 《디 애틀랜틱》 2월호에 실렸다.[1] 노래 가사는 남북전쟁이 마치 성경에 쓰인 말세에 사악을 응징하는 것과 같다는 내용으로 구약성경 이사야서 63장과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따왔다.[2] 노래는 만들어진 당시부터 널리 불려 왔으며 미국의 애국주의를 대표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1] 대한민국의 개신교에서는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이름의 찬송가로 불리고 있다.[3] 미국 밖 영어권에서는 노래 가사의 앞부분을 따 〈내 눈이 영광을 보았네〉(Mine Eyes Have Seen the Glory)로 알려져 있다.[4]
후렴구 "영광, 할렐루야"(Glory, Hallelujah)는 미국 남부 기독교의 천막 집회에서 널리 구전되던 것으로 1800년대 초에 이미 기록으로 담긴 것이 있다.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가나안의 행복한 강변”〉(Canaan's Happy Shore)으로 이 노래의 가사는 선창자가 "오, 형제여 나를 만나려는가?"를 세 번 반복한 후 "가나안의 행복한 강변에서"[5]라고 노래하면 합창으로 "우리는 함성으로 주께 영광 드리리"를 세 번 노래한 후 "주님께 영광을"하고 노래한다.[6] 이 노래의 합창 부부는 1850년대에 들어 널리 알려진 "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변화한다. 이 후렴구는 미국 남북 전역에 걸쳐 널리 전파되었다.[7]
1861년 5월 12일 일요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인근 워런 요세의 국기 계양식에서 군인들은 〈존 브라운의 시체〉를 부르며 널리알려진 〈오 형제여〉의 "영광, 영광, 할렐루야" 후렴구를 덛붙여 불렀다. 당시는 남북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지난 때로, 이 노래가 이런 형식으로 불린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에 조지 킴벨은 "타이거" 대대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민병대 제2 보병 대대가 〈존 브라운의 시체〉에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후렴구를 붙여 부른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대대에 존 브라운이라는 쾌활한 스코틀랜드 출신이 있었는데, 이 친구 이름이 하필 노예제 폐지운동의 영웅 하퍼스 페리를 습격한 존 브라운과 같아서 동료들 사이에서 이를 빗대어 놀리곤 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봐 친구, 어서 와서 노예인 우리를 해방시켜줘야지."라거나 "이 친구는 존 브라운이 아니야, 왜냐면 존 브라운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혔거든."이라는 말들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존 브라운의 시체〉의 노래 가사를 바꾸어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에서 썩고 있지만 그의 혼은 행군중이지" 하고 노래를 부르고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하는 후렴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8]
대대의 장교 가운데 일부는 노래 가사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금지 시키기도 했지만, 노래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여러 다양한 가사들이 지어져 불리게 된 노래는 대대를 넘어 인근 부대로 전파되었고, 지역 시인들도 새로운 가사를 만들어 붙였다.[9] 1918년 출간된 제55 포병대의 공식 사록과 옛 제1 포병대의 공식 기록에서도 타이거 대대가 〈존 브라운의 시체〉를 노랫말을 바꾸어 불렀다고 적고 있으며, 노래 가사는 킴벨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10][11]
킴벨의 대대는 남북전쟁 초기 켄터키주의 머리로 재배치 되었고, 줄리아 워드 하우는 워싱턴 D.C.에서 러퍼스 다우즈가 이끄는 "K" 중대의 행렬이 가사를 바꾼 〈존 브라운의 시체〉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위스콘신 제6 의용 보병대 소속이었는데, 중대의 부사관 존 티크너가 선창하자 모두 후렴구를 합창하였다. 하우는 일행이었던 제임스 프리먼 크라크 목사의 의견을 참고하여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12] 1861년 11월 18일 하우는 워싱턴 D.C.의 윌러드 호텔에서 "공화국 전투찬가"를 새 노래의 제목으로 정했다.[13]
하우의 〈공화국 전투찬가〉는 1862년 2월 《디 애틀랜틱》에 실렸지만 초기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863년 필라델피아의 모병 유색인 연대의 감독위원회가 이 노래를 배포하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존 브라운의 시체〉와 〈공화국 전투찬가〉는 둘 다 1874년 켐프 신부가 펴낸 〈오래된 합창 민요〉(Old Folks Concert Tunes)에 실렸고, 이 책은 1889년 다시 발간되었다. 책에 실린 두 노래 모두 "영광, 영광, 할렐루야"의 후렴구가 붙어있다.[14]
줄리아 워드 하우는 유명한 교육가였던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의 부인이다. 부부는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였고 북군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새뮤얼 하우는 하퍼스 페리를 습격한 존 브라운도 함께하였던 6인 결사도 가담하였다.[15]
〈가나안의 행복한 강변〉은 운문과 후렴이 같은 길이로 되어 있고 둘다 동일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 브라운의 시체〉는 그보다는 보다 분절되고 율동적인 변화로 이루어진 가사를 추가하였다. 하우의 가사는 이 보다도 짧게 끊어지는 멜로디를 갖고 있다. 〈공화국 전투찬가〉의 가사는 여전히 〈존 브라운의 시체〉와 같은 멜로디 위에 놓여 있지만 당김음을 많이 사용하여 더욱 경쾌한 진행을 보인다.
아래는 다장조로 이루어진 멜로디 예시이다.
하우가 1862년 《디 애틀랜틱》에 투고한 가사는 아래와 같다.[16][17] 합창 부분은 훗날 조금씩 바뀌어 불리기도 하였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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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버전에선 아래와 같은 구절이 가사에 추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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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동안 〈공화국 전투찬가〉는 종종 일종의 애국가로 불렸다.[1] 이 노래는 윈스턴 처칠의 애창곡이기도 하였다.[23]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공수부대원 사이에선 이 노래를 개사한 〈낙하산 줄에 묻은 피〉가 불렸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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