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자로 한정되는 등 궁중에서의 대우는 각별하였고, 더욱이 딸을 장군의 정실(미다이도코로)로 들인 관백도 많아, 고노에 모토히로(近衛基煕)처럼 거꾸로 막부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백도 있었다. 대정봉환 직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신정부의 초안으로서 제시했던 인사안에는
했다. 이러한 긴장감은 당시 11살에 가까워진 무쓰히토 친왕도 직접 느낄 정도였다. 같은 해 7월 19일,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로(鷹司輔煕)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을 행하는 것에 대해 교토에 있는 각 번주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돗토리번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池田慶徳)는
타다카) 51 세 종 1 위 · 좌대신 니조 나리유키 47 세 종 1 위 · 우대신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39 세 青蓮院門主 鷹司輔煕 (타카츠카사 스케히로) 56 세 종 1 위 · 전 우대신 徳大寺公純 (토쿠다이지 킨이토) 42 세 정2위 · 내대신 나카야마 다다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