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 칭하였다. 견훤은 900년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 또한, 후백제는 신라가
한 원종 효평황제 유간(漢 元宗 孝平皇帝 劉衎, 기원전 9년 ~ 기원후 5년,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는 전한의 14대 황제이다. 본래 휘는 기자(箕子)였으나, 간으로 고쳤다. 중산효왕 유흥의 아들로 어머니는 위희(衛姬)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중산왕이 되었으며
진주군에서 파지(巴只), 백곡(栢谷), 금만(金萬), 사월(沙月), 삼장(三壯), 시천(矢川)의 육면(六面)을 분할받아 군의 규모가 배가된 것이다. 단성현(丹城縣) 삼국사기에 나타난 단성 최초의 명칭은 궐지군(闕支郡)이다. 경덕왕 16년(757년) 궐지군은 궐성군(闕城郡)으로
의해 빼앗겼다. 또, 906년에는 상주의 사화진 일대에서 왕건과 싸워 패전하였다.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사를 재정비한 후백제는 907년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모두 공취하였다.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서해의 해상권 회복을 위해 나주성(羅州城)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