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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알바니아 폭동
1997년 알바니아에서 발생한 무장 반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997년 알바니아 폭동은 1997년 알바니아에서 발생한 무장 반란이다. 폰지 사기를 계기로 일어난 이 사건은 반란, 내전 또는 내전으로 확대된 반란 중 하나로 규정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알바니아에서는 정국 불안이 지속되었고,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다.[1][2]
1997년 알바니아 폭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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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라나에 체류 중인 자국민들을 대피시키는 미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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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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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알바니아 시민들은 총합 1.2억 달러를 잃었고, 이들 중 3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2월부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일일 시위를 개시하며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했고, 그들은 정부가 계획안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다고 믿었다. 3월 1일 총리 알렉산데르 멕시가 사임했고, 3월 2일에는 대통령 살리 베리샤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3월 11일, 알바니아 사회당이 지도자였던 바슈킴 피노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전환 이후에도 시위는 그치지 않았고, 시위가 북부 알바니아로 확산되게 되었다. 정부는 북부 알바니아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정부의 능력과 군 유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알바니아 남부의 절반은 반군과 범죄 갱단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3]
대부분의 인구가 모인 지역은 3월 13일에 데모에 휩싸이게 되었고 외국은 알바니아 내 거주 중인 자국민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철수에는 리벨레 작전과 실버웨이크 작전, 그리고 코스마스 작전이 포함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101호를 통해 3월 28일 7,000명의 병력 파견을 승인했고, 알바니아 내 질서 회복과 구호 활동을 지시했다. 유엔은 시위가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 확산되고 유럽 전체로 피난민이 이동할 것을 우려했다. 4월 15일 이탈리아가 주도한 알바 작전이 개시되었다.[3] 반란 이후 약탈된 무기들은 코소보 해방군에게 넘어갔고,[4] 대부분의 무기는 코소보 전쟁 때 사용되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