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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농민 전쟁
17세기 스위스의 역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스위스 농민 전쟁(Swiss peasant war)은 1653년 앙시앵 레짐 당시 구스위스 연방에서 대중적인 반란이었다. 베른 화폐의 평가절하로 인해 루체른주의 엔틀레부흐 계곡에서 베른주의 에멘탈 계곡, 졸로투른과 바젤, 그리고 아르가우까지 퍼진 조세 반란이 일어났다.
스위스 농민 전쟁 Swiss peasant war of 16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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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농민군 | 시정부군 | ||||||
지휘관 | |||||||
니클라우스 로이엔베르커 크리스티안 쉬비 등 |
콘라트 베르트뮐러 지그문트 폰 에를라흐 세바스찬 페레그린 츠비어 |
시골 주민들은 그들의 통치 당국인 칸톤 수도의 도시 의회에 재정적 구호를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가 시 당국에 의해 기각되자 농민들은 스스로를 조직하고, 도시를 봉쇄하겠다고 위협했다. 다른 주의 중재로 초기 타협이 실패한 후, 농민들은 후트빌 조약에 따라 연합하여 ‘후트빌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의 운동은 처음에는 순전히 재정적 요구를 넘어서 더욱 급진적이었다. 후트빌 동맹은 스스로를 시 당국과 동등하고, 독립적인 정치적 실체로 여겼으며, 영토에서 완전한 군사적, 정치적 주권을 주장했다.
농민들은 베른과 루체른을 포위했고, 그 후 도시들은 농민 지도자 니클라우스 로이엔베르커와 이른바 무리펠트의 평화라고 불리는 평화 협정을 맺고 농민군은 후퇴했다. 구스위스 연방의 연방 평의회인 타크자충은 반란을 결정적으로 끝내기 위해 취리히에서 군대를 보냈고, 볼렌쉬빌 전투 이후 후트빌 동맹은 멜링엔의 평화 속에서 강제로 해산되었다. 엔틀레부흐 계곡의 마지막 저항은 6월 말까지 무너졌다. 승리 후 시 당국은 과감한 처벌 조치를 취했다. 후트빌 동맹과 무리펠트의 평화는 베른 시의회에서 무효로 선언되었다. 봉기의 많은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중형을 선고를 받았다. 니콜라우스 로이엔베르커는 1653년 9월 6일 베른에서 참수되고 네 갈래로 절단되었다.[a]
절대주의 도시 당국은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은 또한 그들이 농촌 주민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지배 귀족들은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고, 심지어 세금을 일부 인하하여 농민의 원래 재정 요구를 일부 충족시켰다. 장기적으로 1653년의 농민 전쟁은 루이 14세의 통치기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스위스가 절대주의로 과도하게 빠져드는 것을 막았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