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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지진
1948년 일본 후쿠이현에서 일어난 지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후쿠이 지진(일본어: 福井地震 후쿠이지신[*])은 1948년(쇼와 23년) 6월 28일 16시 13분 경[lower-alpha 1][8] 일본 후쿠이현 레이호쿠 북부(후쿠이시 동북쪽 약 10 km, 현재의 사카이시 마루오카초 부근[9])에 일어난 지진이다. 지진의 규모는 일본 기상청 규모 기준 Mj 7.1로, 후쿠이시에서 당시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가장 높은 등급이었던 진도6 (열진)을 기록하였다.[lower-alph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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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진 직후 붕괴된 다이와 백화점 | |
본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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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C 시각 | 1948-06-28 07:13:31 |
ISC 지진번호 | 897413 |
USGS-ANSS | ComCat |
현지일 | 1948년 6월 28일 |
현지시간 | 16시 13분 28.8초(JST, 일본 기상청 기준) 16시 13분 31.0초(JST, 미국 지질조사국 기준) |
규모 | 모멘트 규모 6.8[1] 일본 기상청 규모 Mj7.1 |
최대 진도 |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진도 6 : 후쿠이현 후쿠이시 |
진원 깊이 | 매우 얉음, 최대 15 km |
진앙 | 일본 후쿠이현 사카이군 마루오카정 부근 북위 36.2° 동경 136.2° / 36.2; 136.2[2] |
종류 | 내륙 지각 내 지진 좌향주향이동단층[3] |
여진 | |
횟수 | 본진 후 1년간 983회(유감지진 652회)[4] |
최대여진 | 1948년 6월 28일 16시 19분 44초 규모 M5.8, 최대진도 3 지진[5] |
피해 | |
피해 지역 | 후쿠이현 북부 및 이시카와현 남부 |
지진해일 | 없음[6] |
사상자 | 사망자 및 실종자 3,769명[7] 부상자 22,203명 |
1945년 7월 경 후쿠이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하기 시작한 후쿠이시를 직격한 도시의 직하형지진이다.[10] 후쿠이평야 거의 전역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11] 이웃한 이시카와현의 피해를 합치면 사망자 3,769명, 부상자 22,000명 이상, 완전 붕괴 가옥 36,000채에 달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후쿠이현 사카이군 가나즈정(현 아와라시 동부), 마루오카정, 하루에정(현 사카이시 남부), 요시다군 모리타정(현 후쿠이시 북부)[12]에서는 각 마을의 모든 주택이 무너졌다.[12] 진앙에서 다소 떨어진 후쿠이시 시내에서도 가옥붕괴율이 79.0%에 달했으며[13] 후쿠이평야 전역으로 보더라도 가옥붕괴율이 60%를 넘었다.[14] 도시 지역에서는 화재도 발생하여 피해를 더 키웠다.[12] 또 피해 지역 내를 흐르는 구즈류강의 제방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어 지진 약 1개월 후인 7월 하순 경 상류의 기록적인 폭우로 제방이 붕괴되어 수해를 입는 등 여러 피해를 입었다.[15][16][17]
후쿠이 지진은 1891년 노비대진재와 1923년 간토대진재에 이은 대진재 중 하나이다.[1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중 2011년 동일본대진재와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진재에 이어 3번째로 사망자가 많은 지진이다.[10] 주택붕괴율이 매우 높은[19] 후쿠이 지진을 계기로 일본 중앙기상대 진도(현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져 1949년 진도7(격진)[lower-alpha 2]이 신설되었다.[10][18]
3년 사이 전쟁, 지진, 수해 및 각종 재해로 후쿠이시는 잿더미로 돌아갔으나 이후 다시 시 재개발 및 부흥을 이루어내며 후쿠시마는 시민헌장으로 "불사조의 시"로 선언하는 등 급격한 발전을 이뤄냈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