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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라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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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라뮈(프랑스어: Pierre de la Ramee, 1515년 ~ 1572년)는 프랑스 왕국의 인문학자, 논리학자, 교육 개혁가이다. 지금의 우아즈주내 소도시 출신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당시 희생되었다. 인크리스 매더는 그에 대해 '위대한 학자이면 축복받은 순교자'라고 칭송했다. 비국교도 위그노였던 그는 라뮈즘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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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뮈는 21살의 나이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고, 그가 가진 방법이 허구라고 주장하였다.
파리 대학교에서 평생을 교사로 섬겼다. 1543년 Dialecticae의 초판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논리의 기술을 개혁하려 하였다. 그는 르네상스 지성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뉴잉글랜드는 존 칼빈 다음으로 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중세만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과 플라톤의 대화가 주된 교과서였다. 그 이후로 변증법과 논리학을 추론으로 연결시키려 했지만, 그것이 명확하지 않자, 라뮈의 선구자인 로돌푸스 아그리콜라가 변증법을 모든 논리에까지 확장시켰다. 그것은 발명과 판단의 두가지로 나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