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디아(타밀어: பாண்டியர் 판디야르)는 남인도의 고대 타밀 왕조로, 팔라바, 촐라, 체라와 함께 타밀라캄 4대 왕국들 중 하나이다.[7] 적어도 기원전 4세기부터 3세기까지 존재했던 판디아 왕조는 두 차례의 제국 지배 기간, 즉 서기 6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기간, 그리고 '후기 판디아' (서기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시대를 거쳤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아 1세와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판디아 1세의 통치 아래, 판디아는 마두라이의 영향을 받은 봉신국들을 통해 현재의 남인도와 스리랑카 북부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다.[8][9]
세 타밀 왕조의 통치자들은 "타밀 국가의 세 명의 통치자(무-벤타르)"라고 불렸다.[7][10] 판디아 왕조의 기원과 연대는 확립하기 어렵다.[9] 초기 판디아 족장들은 내륙 도시 마두라이와 남부 항구 코르카이를 포함한 고대 시대부터 그들의 나라(판디아나두)를 통치했다.[11][12] 판디아는 가장 오래된 타밀 시(상감 문학)에서 기념된다. 그리스-로마 기록(기원전 4세기[9]),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의 칙령, 타밀-브라흐미 문자로 전설이 담긴 동전, 타밀-브라흐미 비문 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초기까지 판디아 왕조의 연속성을 시사한다.[13][14][11] 초기 판디아는 남인도 칼라브라 왕조의 등장으로 쇠퇴했다.[15]
서기 6세기부터 9세기까지 데칸의 찰루키아 또는 라슈트라쿠타, 칸치의 팔라바, 마두라이의 판디아가 남인도의 정치를 지배했다. 판디아는 비옥한 하구인 카베리(촐라국), 고대 체라국(콩구와 중부 케랄라), 베나두(남부 케랄라), 팔라바국, 스리랑카를 자주 지배하거나 침입했다.[16] 판디아는 9세기 탄자부르의 촐라가 부상하면서 쇠퇴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판디아는 13세기 후반 국경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찾을 때까지 싱할라족, 체라족과 동맹을 맺고 촐라 제국에 대항했다.[17]
판디아는 마라바르만 1세와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아 1세 (13세기) 아래 황금기에 접어들었다.[8][9] 촐라국까지 확장하려는 마라바르만 1세의 초기 노력은 호이살라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18] 자타바르만 1세(1251년경)는 성공적으로 왕국을 남쪽 케랄라의 텔루구국, 북쪽으로는 넬로르까지까지 확장하고 스리랑카 북부를 정복했다..[8][9] 칸치라는 도시는 판디아의 보조 수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호이살라는 마이소르 고원에 국한되어 있었고, 심지어 소메스바라 왕도 판디아와의 전투에서 죽었다.[19] 마라바르만 쿨라세하라 1세는 1279년 호이살라와 촐라의 동맹을 물리쳤고, 스리랑카를 침공했다. 존경할 만한 석가모니의 치아사리는 판디아에 의해 옮겨졌다. 이 기간 동안, 왕국의 통치는 몇몇 왕족들이 공유했고, 그들 중 한 왕족은 나머지 왕권을 누렸다.[19] 판디아 왕국의 내부 위기는 1310년부터 1311년까지 할지 왕조의 남인도 침공과 동시에 일어났다.[9] 그 뒤 이어진 정치적 위기로 인해 더 많은 술탄국의 습격과 약탈이 있었고, 남부 케랄라(1312년)와 북부 스리랑카(1323년)를 잃었고, 1334년에 마두라이 술탄국이 설립되었다.[4][20][21] 퉁가하드라 계곡에 있는 우창기(9세기–13세기)의 판디아는 마두라이의 판디아와 관련이 있었다.[9]
전승에 따르면, 전설적인 상감 ("학원")들이 판디아의 후원 아래 마두라이에서 열렸고, 판디아의 통치자들 중 일부는 그들 자신이 시인이라고 주장했다. 판디아나두는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사원을 포함한 많은 유명한 사원들의 본거지였다. 카둔곤에 의한 판디아 권력의 부활은 시바파 나야나르들과 비슈누파 알바르들의 명성과 동시에 일어났다.[22] 역사상 판디아의 통치자들은 짧은 기간 동안 자이나교를 믿었다고 알려져 있다.[9][23]
역사
초기 판디아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초기 남인도 지역에서는 크게 세 줄기의 국가들이 번성하였다. 체라, 판디아, 촐라가 바로 그들이었는데, 이들은 타밀라캄에 본거지를 두고 각각 카루르, 마두라이, 우라이유르 등의 도시에서 부족 연맹의 형태로 번성하였다.[24] 이들의 지도자들이 남인도 지방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장악하였으며 서로 간 다툼과 전쟁을 벌이며 흥망을 반복하였던 것이다.[25] 체라, 판디아, 촐라는 무지리스, 콜카이, 카베리 등의 항구들을 장악하여 로마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였으며[26],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력이 커지며 부족간 연맹체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27]
한편 기원전 3세기경 북인도 지역에 존재하던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아소카는 남인도와 스리랑카 지역에 살고 있던 촐라, 판디아, 사티야푸트라, 케랄라푸트라와 같은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아소카가 남인도 지역을 끝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현재까지 찾아볼 수 없다.[28]
기원전 1세기 중반 하티굼파 지역을 다스렸던 카라벨라 왕이 남긴 석비에는 칼링가를 위협하던 '트라미라' 부족들에 맞서 승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석비에는 그 외에도 '판디아' 지방에서 건너온 진주들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당시 판디아 지방은 진주와 비단 산업으로 유명하였으며 콜카이와 알라간쿨람 등에서 활발한 교역이 진행된 것으로 보여진다. 탐브라파니 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는 콜카이 항에서 진주를 채취하였으며, 알라간쿨람도 항구로 번성하였다.[29] 판디아 지방에서는 당시에 주조된 여러 동전들도 발굴된 바 있으며,[30] 또한 기원전 2세기 즈음에 발굴된 석비에서도 왕실과 부유한 평민들이 왕에게 바친 왕실 보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31]
판디아는 체라와 촐라를 제치고 이들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3세기의 자료에 의하면 판디아의 여왕이 이 세 부족체를 모두 대표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타밀인들이 사는 남인도 지역의 최고 중심지는 바로 마두라이였다. 또한 남인도 유적지에서는 철제 용품들을 포함한 장례용 부장품, 상아 조각, 검붉은색의 장신구, 심지어는 로마 금화까지 발견되었다.[32]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기원전 1세기 즈음에 타밀계 국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33] 또한 타밀-브라흐미 비문들에는 판디아의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역사가 간략하게나마 적혀있다. 초기 판디아, 체라, 촐라는 결국 칼라브라 왕국에게 멸망당해 흡수당했다.[34]
하단은 남인도에서 번성하던 초기 판디아계 왕조의 군주 목록들 중 일부이다.[35] 초기 타밀인들이 지은 시에는 12명의 군주들의 이름이 나와있다.
- 쿤 판디아
- 네둔젤리얀 1세
- 푼다 판디아
- 무두쿠두미 페루발루디
- 네둔젤리얀 2세
- 난 마란
- 네둔즈 첼리얀 3세
- 마란 발루디
- 카달란 발루티
- 무시리 무트리야 첼리얀
- 우키라프 페루발루디
전성기 (7세기 - 10세기)
판디아 왕국은 590년부터 620년까지 통치한 카둔곤 왕 재위기인 6세기 말에 전성기를 맞았다.[16][36] 남인도에서 발굴된 기록판인 벨비쿠디 동판에 의하면 카둔곤 왕은 '브라흐마에 대항하는' 칼라브라 왕들의 '파괴자'로 묘사되었으며,[16] 칼라브라가 쇠퇴함에 따라 판디아 왕국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반면에 촐라족은 상대적으로 본거지에 머물며 세력을 확장하지 않았다.
6세기부터 9세기까지 남인도 지방은 크게 팔라바 왕국, 찰루키아 왕국, 판디아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찰루키아는 이후 데칸 지방에서 발원한 라슈트라쿠타에 멸망당해 흡수당했다.[37] 판디아 왕국은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팔라바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데칸 지방의 왕국들과 동맹을 맺어 세를 키워나갔다. 9세기 중반에는 탄조르 동부에 있는 쿰바코남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도 하였다. 중기 판디아의 3대 국왕인 센단은 타밀나두 서부 지역에 살고 있던 체라 왕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4대 국왕인 아리케사리 마라바르만은 팔라바 왕국과 맞서 싸웠다. 팔라바 국왕이었던 나라심하바르만 1세는 판디아 왕국을 꺾었다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찰루키아 국왕이었던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 비크라마디트야는 카베리 분지에서 팔라바 왕국과 싸웠으며, 아마도 판디아 왕국과도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찰루키아의 마지막 국왕인 키르티바르만 2세는 판디아 왕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부 지방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마라바르만 라자심하 1세나 네둔자다이얀 1세와 같은 판디아 국왕들은 팔라바 왕국을 위협하였고, 특히 네둔자다이얀 1세는 팔라바 왕국을 침공하여 타밀나두 서부 지방과 베나두 지방을 정복해냈다.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왕은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 세나 1세를 죽이고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약탈하였다.[16] 허나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팔라바 왕국에 의하여 왕좌에서 쫓겨났고, 아누라다푸라 차기 국왕인 세나 2세는 보복 차원으로 판디아 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는 수도 마두라이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바라구나바르만 2세를 새로운 판디아 국왕으로 지명하였다.[16] 대략 825년부터 베나두 지방이 판디아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측된다.[38]
단티바르만 국왕의 재위기에 팔라바 왕국의 영토는 남쪽에서 잠식해들어오는 판디아 왕국의 침략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난디바르만 3세는 강가와 촐라의 도움을 받아 판디아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16]
판디아 국왕들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39]
- 카둔곤
- 마라바르만 아바니술라마니
- 첼리얀 센단
- 아리케사리 마라바르만
- 코 차다이얀 라나디라
- 마라바르만 라자심하 1세
- 파란타카 네둔자다이얀 1세
- 마라바르만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 바라구나바르만 2세
- 파란타카 비라나라야나
촐라 지배기 (10세기 - 13세기)
판디아와 라슈트라쿠타가 팔라바 왕국, 아누라다푸라 왕국, 동강가 왕국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카베리 삼각주에서는 촐라 제국이 떠올라 탄자부르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촐라 황제인 비자얄라야는 850년 즈음에 무타라이야르(타밀나두의 지방 귀족층)[40]의 지도부를 공격하여 승리, 탄자부르 지방을 점령하였다.[41] 이로 인하여 판디아의 카베리강 북부 지방에 대한 통제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팔라바 국왕인 느리파툰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판디아 국왕이었던 바라구나바르만 2세는 촐라 제국으로 진군하였는데, 이 곳에서 팔라바, 촐라, 그리고 강가족의 왕인 프리티비파티 2세의 연합군대를 마주하였다. 결국 판디아 군대는 쿰바코남 인근에서 연합군에게 880년 즈음에 대패하였다.
897년 즈음이 되자 촐라 제국의 황제인 아디트야 1세가 팔라바 왕국, 강가족, 콩구 주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아디트야 1세가 콩구 주를 판디아의 파란타카 비라나라야나 왕에게 빼앗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디트야 1세의 후계자인 파란타카 1세가 910년에 촐라군을 이끌고 판디아를 침공하여 수도 마두라이를 점령하자 당시 판디아 국왕이었던 라자심하 2세는 아누라다푸라 국왕의 도움을 받아 파란타카 1세에게 대항하였으나 벨루르 전투에서 파란타카 1세에게 패배하면서 라자심하 2세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있는 스리랑카섬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라자심하를 포함한 판디아 왕실은 라자심하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체라로 망명하였다.
949년 촐라 제국이 타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패한 후 남부의 봉신국들이 촐라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세력이 약화되자 판디아 국왕 비라 판디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4세와 동맹을 맺어 촐라 제국을 2번이나 공격하였으나, 당시 촐라 황제였던 순다라 파란타카 2세에 의해 판디아군은 패배하고 국왕인 비라 판디아는 전사하였다. 이후 1005년경 촐라 제국의 황제 라자라자 1세는 판디아를 공격하였으며, 판디아, 체라, 아누라다푸라 연합군과 싸워 이긴 끝에 판디아를 마두라이에서 쫓아냈다.[42] 라자라자 1세의 후계자인 라젠드라 1세부터 판디아 왕국은 촐라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하였으며 촐라족 출신의 총독에게 '촐라 판디아'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마두라이에서 통치하도록 하였다. 쿨로퉁가 황제의 재위기 초반에 촐라는 스리랑카의 지배권을 잃었으며, 이때부터 판디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42]
12세기 후반부에는 판디아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며 격변을 맞이하였다. 파라크라마 판디아 왕자와 쿠라세카라 판디아 왕자 간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스리랑카의 여러 왕국들과 체라 왕국 등은 쿠라세카라 판디아 왕자의 편을 들었으며,[42] 라자디라자 2세와 쿨로퉁가 3세 등의 촐라 제국의 황제들은 두 왕자들 사이에서 더 우세한 쪽을 연이어 번갈아가며 편을 들며 내분을 부추겼다.[43][42]
하단은 10세기와 11세기 초중반에 재위한 판디아의 국왕 목록이다.
- 순다라 판디아 1세
- 비라 판디아 1세
- 비라 판디아 2세
- 아마라부장가 티브라코파
- 마라바르만 파라크라마 촐라 판디아
- 자타바르만 촐라 판디아
- 스리발라바 마나쿨라찰라
- 마라바르만 스리발라바
- 파라크라마 1세
- 쿨라세카라 3세
- 비라 판디아 3세
- 자타바르만 스리발라바
- 자타바라만 쿨라세카라 1세
판디아 제국 (13세기 - 14세기)
판디아 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남인도 지역 상당수와 스리랑카 전 지역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판디아의 황제는 마두라이에 거주하며 황실 방계 후손들을 지방 총독들로 보내어 제국 전역을 통치하였다. 제국은 황제 뿐만 아니라 황실의 여러 남성들이 나누어 지배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황제가 독보적인 통제권을 가졌다.[44]
13세기에는 판디아에서 ‘엘라쿠 나야나르 - 만인의 군주’라고 하는 여러 황제들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여러 판디아 황족들과 함께 국가를 다스렸는데, 황권은 13세기 중반에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의 재위기에 정점을 찍었다.[45]
-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
- 순다라바르만 쿨라세카라 2세
-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
-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
-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
- 순다라 판디아 4세
- 비라 판디아 4세
남인도 지역에서 판디아의 우월성은 13세기 초에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 초기에 확립되었다. 그는 1216년에 그의 형이었던 자타바르만 쿨라세카라로부터 황위를 계승하였으며,[46] 촐라를 침공하여 우라이유르와 탄자부르를 약탈하였으며 당시 촐라의 황제였던 쿨로퉁가 1세를 쫓아냈다.[47] 촐라 황제는 결국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에게 투항하였으며, 그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이후 즉위한 촐라 황제 라자라자 3세는 촐라로 끊임없이 침공해들어오는 판디아를 막아내고 독립을 얻어내기 위하여 호이살라 국왕 나라심하 2세의 도움을 받아 카베리 계곡에서 판디아 군대와 대격전을 벌였다.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라자라자 3세는 독립을 쟁취하여 촐라 제국을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촐라의 라젠드라 3세 황자는 판디아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를 포함한 여러 판디아 귀족들을 전투에서 꺾기도 하였다. 호이살라 국왕 소메스바라는 판디아의 도움을 받아 라젠드라 3세를 꺾었으며 촐라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중흥기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1251년에 황위에 올랐고, 촐라 제국을 공격하여 스리랑카에서 케랄라 남부 지방까지도 진군하였다. 그는 호이살라 왕국의 지배를 미조르 평원에서 쫓아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부유한 도시 칸치가 당시 왕국에서 2번째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의 원정 기간 동안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자타바르만 비라 판디아와 같은 여러 판디아계 고위 귀족들과 함께하였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라젠드라 3세를 1258년 즈음에 눌렀고, 그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1279년에는 라젠드라 3세와 함께 촐라의 통치도 끝나게 된다. 판디아는 카베리에서 호이살라를 공격하였으며, 카나누르 코팜 요새를 무너뜨렸다. 당시 호이살라 국왕이었던 소메스바라는 미조르 평원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남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호이살라 국왕은 결국 왕국 영토의 반을 그의 아들인 라마나타에게 물려주었다. 소메스바라 국왕은 결국 1262년에 판디아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라마나타는 카나누르 요새를 탈환하고자 하는데에는 성공하였다.[48][49]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이즈음 카다바의 지배자인 코페룬징가 2세와도 분쟁을 벌였는데,[50] 이 시기에 호이살라와 카다바의 전쟁통에 바나 주와 콩구 주가 판디아의 영역권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카카티야의 지배자인 가나파티와도 싸웠다. 스리랑카는 1258년에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의 침공을 받았으며,[51] 그의 명령을 받은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하여 1262년과 1264년에도 침공을 받았다.[52] 이후 1270년에도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하여 또다시 약탈당하고 패배하였다.[53]
순다라 판디아 1세는 1268년에 죽었고,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새로 즉위하였다. 1279년에 호이살라 국왕 라마나타와 촐라의 라젠드라 3세의 연합군이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이들을 꺾고 거의 무적으로 불리게 된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는 촐라 제국, 호이살라의 남부 지역까지 모두 지배하였다. 그는 당시 부파나이카바후 1세가 다스리던 스리랑카를 침공하였으며, 그 곳에 있던 신성한 유물들과 막대한 부를 가지고 왔다. 이후 스리랑카는 1308년까지 판디아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다.
제국의 쇠퇴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1310년에 죽은 이후, 그의 아들들인 비라 판디아 4세와 순다라 판디아 4세가 황위계승 전쟁을 벌여 제국을 내전상태로 몰아넣었다.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는 비라 판디아 4세가 황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54] 이 시기에 북인도의 이슬람 국가인 델리 술탄국이 판디아 제국을 약탈하였고,[55] 호이살라 국왕이었던 발라라 3세도 기회를 엿보다 판디아의 내전 상황에서 판디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발라라 3세는 델리 술탄국의 장군인 말리크 카푸르가 같은 기간에 호이살라도 공격하자 자신의 수도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발라라 3세를 쫓아낸 이후, 칼지 군대는 1311년 3월에 판디아로 진군하였는데,[56] 두 형제들은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고 델리 술탄국 군대는 이들을 놓쳤다.[57][58] 1311년 4월 말, 칼지는 두 형제에 대한 추적을 그만두고 델리로 돌아와 약탈을 지속하였다.[59][60] 1312년에 판디아는 케랄라 남부에 대한 지배권도 잃어버렸다.
델리 술탄군이 떠난 이후, 비라 판디아와 순다라 판디아는 서로 내전을 재개하였다. 이 때 순다라 판디아가 패배했고, 델리 술탄국에 구원을 청했다. 순다라 판디아는 델리 술탄국의 도움을 받아 아르콧 남부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는 1314년 즈음에 쿠르소 칸에 의해 판디아가 약탈을 당했고,[60] 1323년에는 울구르 칸에 이끈 술탄국에 의하여 또 약탈을 당했다.[60] 술탄국들의 약탈을 연이어 당한 이후, 울구르 칸은 판디아의 이전 영토들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후 남인도 대부분의 지방들이 술탄국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5개의 지방들로 나뉘어 통치되었다.[61] 잘랄 우드-딘 하산 칸이 새롭게 만들어진 마바르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62][63] 1334년에 잘랄 우드-딘 하산 칸은 독립을 선언했고, 마바르 술탄국을 세웠다. 판디아는 마두라이에서 쫓겨나 텐카시로 수도를 옮겼고, 16세기 말까지 주변 조그만 영토를 차지하고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다. 이 시기의 판디아를 텐카시 판디아라고 부른다.[64]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부카 라야 1세가 마두라이를 1370년에 정복하고 술탄을 옥에 가두었다. 그는 아르콧의 왕자인 삼부바 라야를 왕좌에 다시 올렸으며, 자신의 아들인 비라 쿠마라 캄파나를 타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 시기에 마바르 술탄국은 1378년에 비자야나가라가 임명하는 나야크 총독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65] 1529년에는 나야크 총독들이 독립을 선포하였고,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를 세웠다.
후계
텐카시 판디아조차도 16세기에 완벽히 멸망하였으나, 2개의 가문들이 판디아 왕실의 후계를 주장하며 존속하였다. 푼자르 가문은 판디아의 고대 혈족임을 주장하였다. 촐라 황제인 쿨로통가 1세가 판디아를 침략하였을 때, 마니비크라마 쿨라세카라 왕자가 이들을 피해 케랄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 곳에서 왕자는 땅을 좀 얻었고, 푼자르라고 하여 새로운 가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푼자르 가문에도 더 이상 적통 후계자가 남아있지를 않았고, 결국 사카라 가문의 남자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를 이어갔다. 이 가문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에서도 상당히 존경받고 있다.
판디아의 후계를 주장하는 또다른 가문은 판달람 가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판디아 참파카누르 가문의 한 왕자가 신하들의 음모를 피하여 서고츠산맥 지방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결국 그 왕자는 코니 지방에 정착했고, 903년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12세기에 촐라의 침공 동안 그들은 또다시 판달람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18세기 이후까지도 트라방코르 왕국에 통합되지 않았으나, 이후에는 통합되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은 여전히 사회에서도 명망이 높다.
경제
오늘날 남인도와 스리랑카 지역을 다스리던 판디아는 고대 그리스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고대 그리스 상인들은 판디아의 촐라, 체라계의 가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서양의 선원들은 이 부근에 여러 기지들을 세워 반영구적인 무역소로 만들기도 하였다. 남인도 지방과 그리스-로마 세계 간의 교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이래 꾸준히 진행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남인도와 중동 지방 간의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7세기 경에 홍해와 이집트를 잃고 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판디아 지방은 워낙 남인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해상 교역로에서 필수적인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는 이점을 누렸다. 상인들은 해로를 통하여 동남아시아로 향할 적에 판디아 지방을 반드시 거쳐갔고, 이로 힘입어 판디아 경제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진주 채취
판디아에서 가장 번창하던 산업은 진주 어장 산업으로, 항구도시 코카이는 진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리스와 이집트 항해자들의 서면 기록 중 에리트레이안해의 페리푸스는 "인도에서 소비되지 않는 질이 낮은 진주는 아폴로가와 오마나의 시장에서 대량으로 수출된다"고 언급하고 있다.[66] 타밀 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던 질 낮은 진주조차도 외국 시장에서 매우 큰 수요를 보였던 것이다. 진주는 아주 질좋은 모슬린 천으로 포장되어서 수출되었다. 로마 제국이 인도로부터 수입한 가장 비싼 제품은 만나르 만에서 나온 진주였으며 판디아 왕국의 진주도 북인도 왕국에서 수요가 있었다.[67] 왕실의 전차들을 끌고 가는 말들조차 진주로 꾸며져 있었으며, 진주의 사용량이 워낙 많아 진주의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진주 어장에 대한 문헌상의 언급은 바다에 뛰어들고 상어의 공격을 피한 어부들이 어떻게 오른쪽으로 휘어진 껍질을 들고 소리나는 껍데기를 불었는지 등이 나타나 있다.[68] 메가스테네스는 판디아의 진주 어장에 대해 보고했는데, 판디아 제국이 진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69]
동전
판디아 왕국의 초기 동전에는 호랑이, 물고기, 활이 새겨져 있었다. 이 상징들은 당시 3명의 왕들의 상징이었는데, 각각 촐라, 체라, 판디아 왕국을 상징하던 것이다. 또한 후대에 주조된 동전에는 구리 동전에 은으로 된 펀치마크가 찍혀진 형태였다.[70] 이후 판디아 통치자들의 상징이 새겨진 몇 개의 금화도 발굴되었으며, 이 동전들은 물고기 이미지 역시 하나 또는 둘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처럼 물고기 기호를 가진 동전은 '코단다라만'과 '칸치 발랑금 페루말'이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엘람탈라이야남'은 한쪽 면에는 서 있는 왕이 있고 다른 한쪽에 물고기가 있는 동전들을 뜻하며, '코네니라얀'은 황소가 있는 동전, '칼리가라만'은 발 한 쌍을 그린 동전을 뜻한다.
어떤 동전들은 순다라, 순다라 판디아, 혹은 약칭으로 수(Su)라고 적혀있었다. 그 외의 동전들에는 비라 판디아 등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동전들은 판디아와 촐라족의 영주들에 의하여 주조되었으나, 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해도 그 왕의 재위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판디아 왕국의 동전은 기본적으로 사각형이었고, 한 면에는 코끼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반대쪽은 밋밋하게 아무 장식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판디아 시기에 제작된 금화와 은화처럼 가치가 높은 것들은 타밀어로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동전들에는 타밀족의 전설들이 간략하게 새겨져 있었다.
종교
초기 판디아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믿었다가 어느 시점에서 힌두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힌두교의 비슈누파와 시바파 모두에서 바크티 운동을 지지했다.[71]
판디아의 힌두교는 사원 중심의 엘리트 형태의 힌두교, 대중적인 바크티 종교, 그리고 훨씬 더 널리 퍼진 지역 형태의 힌두교 세 가지가 존재했다.[72] 이 세 가지의 구분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숭배는 일반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시바 신은 일반적으로 나중에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바크티 운동은 신과 신자 사이의 상호 강렬한 정서적 애착을 강조했다.[73]
판디아국에는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사원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사원이 있었으며,[74] 판디아국의 가장 큰 고용주이자 지주였던 사원은 타밀 경제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75] 일반적으로 사원은 은행, 학교, 진료소, 빈민촌의 역할도 포함하여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판디아국의 대규모 사원 단지에는 여러 행정 사무소와 시장도 있었다.[75]
문학
타밀계 학자와 시인들이 모여 토론과 문학회를 여는 아카데미인 상감을 바탕으로 하는 상감 문학이 발달하였으며, 그 중 '탈라이얄랑가의 승리자'인 네둔젤리얀 2세와 '희생의 무두쿠디미 페루발루디'는 특별하게 언급되고 있다. 전통 타밀 시 형태인 아카누루와 푸라누루에서 발견되는 몇 편의 짧은 시 외에도, 상감 문학 중 판디아 왕국의 사회와 상업 활동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주요 작품인 《마투라이칸키》와 《넷발트바타》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 만쿠디 마루타나르는 그의 후원자인 네둔체지얀 왕을 코카이의 영주로, 남부 파라다바의 군벌로 언급하고 있다. 《실라파티카람》은 판디아 왕국의 상징이 물고기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건축
바위를 잘라 사원을 건축한 것은 판디아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타밀나두의 티루치라팔리 지역은 판디아 왕국에서 지은 작은 사원들이 무리지어 건축되어 있으며, 시바 사원은 성우 난디의 조형물을 가지고 있다. 후기 판디아시대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비마나(탑 형태로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고푸람(사원의 직사각형 입구와 문)이 개발되었다.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암만 사원과 티루넬벨리의 넬리아파르 사원도 판디아 시대에 지어졌다.[76]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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