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군사 국제주의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냉전 시기 당시 쿠바의 외교 정책은 전 세계의 우호적인 국가들 및 저항 운동에 직접적으로 군사 원조를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1] 이 정책은 직접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1966년 쿠바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2] 그러나, 비공식적인 정책으로서는 쿠바 혁명 직후인 1959년 초에 이미 도입되었다.[2] 이 정책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수행했던 쿠바의 군사 계획의 기초가 되었고, 종종 자문단 및 병참 지원을 제공하는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과 직접 연계되어 수행되었다.[3] 이러한 작전은 국제주의 사절단으로 알려진 해외 사령부를 통해 쿠바의 총참모부들에 의해 종종 계획되었다.[1]
군사 국제주의는 약 30년 동안 쿠바의 외교 및 군사 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고, 국내 국방의 필요성에만 종속되었다.[2] 중앙아메리카의 게릴라 세력을 지원한 것으로 인해 쿠바는 역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미주기구에서 회원국 자격이 박탈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 국제주의자들의 작전은 여러 수준의 비밀 활동과 스파이 활동에서부터 대규모 전투 부대의 공개적인 임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2] 쿠바의 아프리카 주둔군은 앙골라에만 5만 명이 배치되는 등 특히 두드러졌다.[4]
아프리카에 주둔한 쿠바군은 대체로 흑인과 물라토였다.[5]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가 대서양 노예 무역에 참여함으로써 아프리카에 진 빚과 쿠바 독립 전쟁에 애국적인 흑인 쿠바인들이 기여한 결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군대 사용을 정당화했다.[6] 쿠바 정부는 국제주의자 임무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고, 쿠바의 반대 세력들은 종종 미국의 졸개라고 비난받았다.[7]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와 동맹국들은 소련의 대리인으로 쿠바 혁명군 (FAR)을 인식했고, 국제주의 사절단의 사용은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했다.[8] 쿠바 군대를 해외에 배치하는 데는 비교적 경험이 부족한 군대에게 광범위한 전역에 걸쳐 전투 경험을 주는 것과 같은 더 실용적인 이유들도 있었다.[6]
1980년대 중반까지 쿠바의 전체 군사력의 4분의 1이 사회주의 정부나 내전의 여러 파벌들과 함께 싸우며 국제주의 임무에 투입되었다.[8] 적어도 20만 명의 쿠바 시민이 쿠바 혁명군에서 여러 가지 자격으로 해외에서 복무했다.[6] 쿠바의 해외 원정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소련의 물자 및 재정 지원이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줄어들면서, 쿠바의 군사 국제주의도 끝나게 되었다.[6] 쿠바 혁명군은 1989년 9월부터 1991년 5월 사이에 모든 주요 해외 임무를 종료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