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롤터 대공방전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지브롤터 대공방전(영어: Great Siege of Gibraltar, 스페인어: Gran asedio de Gibraltar, 프랑스어: grand siège de Gibraltar)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영국에게서 지브롤터를 되찾기 위해 벌인 싸움이었다.[18] 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참가한 인원이 가장 많은 전투였다.[19]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이후 미국과 영국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부르봉 왕가의 지브롤터 공격은 1782년 9월이 되어서야 패배가 확실해졌다. 영국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한 1783년 2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포위를 중단하였다.[20]
지브롤터 대공방전 | |||||||
---|---|---|---|---|---|---|---|
미국 독립 전쟁의 일부 | |||||||
1782년 존 싱글튼 코플리가 그린 『1782년 9월 지브롤터에서 부양포대의 포위 및 격침』 | |||||||
| |||||||
교전국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 |
스페인 프랑스 왕국 | ||||||
지휘관 | |||||||
조지 엘리엇 로저 커티스[3] 조지 로드니 아우구스트 데 라 모테 |
루이 드 크릴롱 마르틴 소토마요르[4] 루이스 데 코르도바 안토니오 바르셀로[3] 장 르 미쇼 다르송 | ||||||
병력 | |||||||
7,500명[5][6][7] 포함 12척[8] |
65,000명[9][10][11][12][13] 전열함 47척[11] 부양포대 10척 지벡 7척 포함 40척[9] | ||||||
피해 규모 | |||||||
333명 사망[14][15] 1,010명 부상[15] 질병으로 인한 사상자 536명[16]~1,014명[15] |
6,000명 사망 전열함 1척 나포 부양포대 10척 침몰[17] | ||||||
민간인 196명 사망 민간인 병사자 800명[15] |
1779년 6월 16일, 스페인은 13개 식민지의 공동교전국이자, 프랑스 왕국의 동맹국으로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지브롤터에 위치한 영국 해군 거점이 전쟁의 주요 목표였다.[21] 조지 어거스터스 엘리엇이 이끄는 취약한 지브롤터 진지는 1779년 6월 24일부터 1783년 2월까지 봉쇄되었다.[22] 처음에는 마르틴 소토마요르가 이끄는 스페인군만 봉쇄에 참여했다. 스페인 해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780년 조지 로드니가 이끄는 첫 구원군이 도착했고 1781년 조지 다비가 이끄는 두 번째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스페인군의 봉쇄는 실패했다.
스페인군은 진지를 함락시키거나 영국의 구원군을 막는데 계속 실패했고, 1782년 초 사령직을 맡은 루이 드 크릴롱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페인군을 보강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더 많은 대포와 선박, 병력을 모으는 동안 포위는 잠잠해졌고, 1782년 9월 18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대공격"을 개시했다. 지브롤터 진지에는 5,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65,000명의 군인과 전열함 49척, 그리고 새로 개발한 부양포대 10척을 공격에 동원했다. "대공격"은 연합군의 처참하고 굴욕적인 패배였으며, 연합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리처드 하우가 이끄는 영국 구원군이 1782년 10월 연합함대의 봉쇄를 뚫고 진지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1783년 2월 7일 연합군은 지브롤터에 대한 봉쇄를 풀었다. 이 공방전은 미국 독립 전쟁을 끝내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23][24][25][26] 파리 조약의 여러 협상 내용이 공방전이 한창이던 중에 마련되었다.[27][28] 이 전투는 또한 영국군이 치른 공방전 중 가장 긴 공방전이기도 하다.[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