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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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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와이스(George Wythe, 1726년~1806년 6월 8일)는 미국의 변호사, 판사, 저명한 법학자이며, 미국독립선언에 서명한 사람이다.
조지 와이스 George Wyth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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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726년 월 일(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체스터빌 엘리자베스 시티 |
사망 | 1806년 6월 8일(1806-06-08)(80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
성별 | 남성 |
국적 | 미국 |
직업 | 법률가 |
활동 정보 | |
경력 | 미국독립선언 서명자 |
서명 |
미국에서 첫 번째 법학 교수이자 ‘미국 법학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버지니아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고,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회의에서도 대의원을 역임했지만, 제정 회의 초기에 회의를 떠났기 때문에 미국 헌법의 최종 원고에 서명하지 않았다.[1]
와이스는 1768년부터 1769년까지 윌리엄스버그 시장을 역임했다. 1779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 새로 만들어진 법률학 교수에 임명되었고, 미국에서 최초의 법학 교수가 되었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의 제자 가운데는 토머스 제퍼슨, 헨리 클레이, 제임스 먼로와 존 마셜이 있다.
이러한 사람 중에서도 특히 가까웠던 토머스 제퍼슨은 와이스를 ‘제 2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당시 법대생으로 1년 미만 밖에 법을 배우지 않았지만, 제퍼슨은 와이스에게서 5년간 공부를 했고, 둘이서 영문학 작품에서, 정치 철학과 고대 고전 작품까지 모든 종류의 자료를 섭렵했다.
와이스는 1775년에 대륙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독립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했다. 버지니아 연방의 새 정부 형성을 도왔고, 1777년에는 버지니아 연방 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789년 버지니아 대법원 법원의 판사가 되었고, 후에 ‘폭군에게는 언제나 이와 같이 하라’(Thus always to tyrants)라는 버지니아 슬로건을 담은 엠블럼을 제작했다. 이 문장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와이스를 알렉산더 해밀턴과 찰스 핑크니 함께 헌법 제정 회의의 규칙과 절차를 수립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