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콘트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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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콘트라 사건(ماجرای ایران-کنترا, Caso Irán–Contra), 이란-콘트라 스캔들, 또는 간단히 이란-콘트라는 레이건 행정부의 두번째 임기 때 미국에서 발생한 정치적 스캔들이다. 이란에서는 맥팔레인 사건이라고 불린다.[1] 고위 행정 관료들은 비밀리에 무기 제재의 대상이었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호메이니 정부에 비밀리에 무기의 판매를 허용했다.[2] 레이건 행정부는 니카라과의 콘트라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 판매 과정을 이용하기를 바랐다 볼란드 개정을 통해, 미국 정부가 콘트라를 지원하는 것은 미국 의회에서 금지되었다.
이란-콘트라 사건 ماجرای ایران-کنترا Iran–Contra affai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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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이란-콘트라, 맥팔레인 사건 (이란), 이란게이트, 이란-콘트라 스캔들, 레이건게이트 |
참가자 |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버트 맥팔레인, 헤즈볼라, 콘트라, 올리버 노스, 매누처 고르바니파르, 존 포인덱스터, 마누엘 노리에가 |
날짜 | 1985년 8월 20일 ~ 1987년 3월 4일 |
원인 | 이란-이라크 전쟁, 레바논 인질극, 레바논 내전, 볼란드 개정, 니카라과 혁명 |
무기 선적을 위한 공식적인 정당성은 이슬람 혁명 수비대와 연결된 무장 수비대 헤즈볼라에 의해 레바논에 포로로 갇힌 7명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하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는 것이었다.[3] 레이건 행정부 내의 몇몇은 이런 무기 판매가 이란에 영향을 주어 헤즈볼라가 인질을 석방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이란에 승인된 첫 무기 판매는 1981년으로,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미국인을 인질로 잡기 이전이었다.[4]
1985년 말,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올리버 노스 중령은 이란에 판매하는 무기의 수익금의 일부를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반산디니스타 반군 연합인 콘트라에 투자하기 위해 전용했다.[5]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콘트라 반군의 강경한 지지자였지만,[6] 그가 개인적으로 콘트라에 자금을 전용하는 것을 승인했는 지에 대해서는 증거에 논란이 있다.[3] 미국 국방부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가 1985년 12월 7일 손으로 적은 기록은, 레이건이 이란과 인질을 교환할 가능성과 이란 내에서 "중요한 요소"를 위해 HAWK와 TOW 미사일을 판매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7] 와인버거는 레이건이 "그는 불법 혐의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있지만 '거대 강자인 레이건 대통령이 인질들을 석방할 기회를 놓쳤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7] 1986년 11월 무기 판매가 밝혀진 후, 레이건은 국영 TV에 출연하여 무기 이전이 실제로 일어났지만, 미국은 인질들과 무기를 교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8] 레이건 행정부 관리들이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양의 문서를 파기하거나 수사관들을 제지하면서 수사가 지연되었다.[9] 1987년 3월 4일, 레이건은 이 사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전국적으로 방송된 연설에서 "이란에 대한 전략적 개방으로 시작된 것이 인질과 무기를 교환하는 것으로 악화되었다"고 말했다.[10]
미국 의회와 레이건이 임명한 타워 위원회의 3명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조사했다. 두 조사 모두 레이건 대통령 자신이 여러 계획의 정도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3] 또한 로런스 월시 미 법무차관이 미국 특검청에 임명되었다.1986년 12월 특검은 그 계획에 연루된 관리들에 의한 가능한 범죄 행위들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검사를 실시했다. 결국 당시 국방부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를 포함한 수십 명의 행정부 관리들이 기소되었다. 11개의 유죄 판결이 나왔고, 그 중 일부는 항소심에서 기각되었다.[11]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나머지 사람들은 사건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에 사면되었다.[12] 전 독립 위원회 소속 웰시는 사면을 발표하면서 부시가 와인버거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증거에 의해 연루되는 것을 미리 차단한 것 같다면서 부시, 와인버거, 그리고 다른 레이건 행정부 고위 관리들에 의한 "기만과 방해" 패턴이 있다고 지적했다.[13] 월시는 1993년 8월 4일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으며,[14] .나중에 자문위원으로써 그의 경험을 '방화벽: 이란-콘트라 음모와 은폐'라는 책으로 저술했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