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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읍성(邑城) 또는 성곽도시(walled town)는 마을이나 도시 같은 중대규모 거주지를 치안, 행정, 방위의 목적으로 방벽으로 둘러친 성곽형 방어시설이다. 이렇게 거주지를 읍성으로 보호하는 양태는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부터 서쪽으로 중동, 유럽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체적으로 발견된다.[1]
읍성에는 출입구인 성문이 있으며, 추가적인 방호력을 제공하기 위한 곡장이나 치성, 장대, 돈대, 아성 등의 지휘시설 또는 대피시설 겸 방어탑도 있을 수 있다.
읍성은 조선시대에 지방별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던 성을 의미한다. 당연히 해당 지역에서 사람이 많이 사는 중심지 일대에 건설이 되었다. 시대별로 읍성의 수는 다소 변동이 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당시 335개의 행정구역이 있으며 이 중 읍성이 기록된 곳은 96개소 정도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당시 330개의 행정구역 중 160개소의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2~3개소의 성곽이 있는 곳도 있어 실제 성곽으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 190여개소로 나타난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334개의 고을 중 읍성이 있는 고을은 107개로 나타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비해 대폭 감소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수 읍성이 파괴되었으나 후대에 수리를 하지 않으면서 상당수가 퇴락한 것을 반영한다.
한국의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내에는 관아가 있어서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주로 서남해안 지역과 북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평지에만 성을 쌓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인근의 야산을 끼고 함께 성을 쌓는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다만 고려시기 건축되어 조선시대까지 운용된 경주읍성과 같은 예외도 존재한다. 또한 군사 중심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방어력은 거의 없고 관의 통치 중심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형식상의 성을 쌓은 것이 대다수여서 전란이 발생할 때 실질적인 방어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을 하여서 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읍성의 특성은 민과 관이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읍성 내외의 거주민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영주나 귀족과 같은 지배층만 지키는 역할을 한 서양이나 일본의 성(Castle, Citadel)과는 다른 성격의 방어시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반도를 포함한 전세계의 전란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전투가 발생하였을 경우 방어시설이 없는 민간 거주지는 말그대로 초토화되며 주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곤 하였다. 그런 경험을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씩 겪다 보니, 그런 전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생존하여 마을에 남은 주민들 중 강한 저항의지를 가진 이가 선두에 나서 사람들을 모으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침략군들의 횡포에 치를 떨던 주민들이 응하여 모여들고, 거기에 둔전, 부병 및 징병제도 등으로 인해 무기류를 다뤄본적 있는 이들이 적지 않던 한반도 남성들이나 패잔병 등등이 여기에 가세하여 의병의 주력 병력으로 활동하고, 여성 및 어린이, 그리고 무기 및 방어구 제조 장인 등 병력으로 활용되지 않는 인원들은 식량의 보급이나 무기및 방어구등의 제조와 보급을 실시하였으며 때론 여성들도 의병 주력 병력이나 농성중인 관군에 합세해 돌이나 단도류 따위로 적에게 응전하며 자기 몸을 지키다 전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삶을 살다보니, 전략적 중요도가 있는 거주지엔 그 규모에 상관 없이 읍성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읍성의 축조는 기본적으로 토축과 석축을 병행하여 이루어졌으며 체성은 도성 축조기법에 따라 내탁부가 토사로 경사면을 이루도록 축조하였으나 세종 20년에 성벽을 모두 석재로 쌓도록 하고 토사로 이루어진 내탁부도 석재로 계단을 이루도록 하면서 읍성의 석축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석축화 이후 오히려 성이 단기간에 붕괴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5년만에 내탁부를 토사로 경사면을 축조하도록 양식이 다시 롤백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 건설된 읍성 및 다른 대다수 성곽 구조물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는 방어자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장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후면에 경사가 없는 석축성벽은 성벽 위의 병력 초기 배치나(성 밖 군영에 주둔 중이던 병사들이 적 출현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문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자기 배치 위치로 거의 일직선으로 뛰어갈 수 있다. 내부 거주지로 그렇지 못한 이들도 일단 문앞에서 돌았을 때 정면에 보이는 성벽으로 뛰어올라간 뒤 다시 꺾어서 가면 되므로 경로가 아주 단순해진다. 반대편 성벽은 아예 반대편 성문으로 난 큰길 하나만 타고 가면 끝이다. 이는 계단을 타고 오를 때보다 전투배치에 있어서 시간적 여유를 크게 제공하는 장점이다) 손실 대처를 위한 병력 교체를 실시하거나 궁병에게 화살을, 대포에 포환과 장약을 보급하려면 비좁고 오래되면 무너질수밖엔 없는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하지만, 경사를 가진 토사를 쌓아 놓으면 그 경사만 타고 올라가면 되므로 병력의 배치와 화살및 탄약 보급이 매우 쉬워진다. 또한 파손된 화포를 통째로 교체하는 것도 가능해지며 전사상자를 후방으로 운반해 응급처치 하는데에도 유리하다.
읍성 내부에 있는 이 세 시설은 각각 중앙정부의 왕, 고을의 수령, 고을의 향민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 내 핵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객사와 아사가 읍성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이들 건물은 단일 건물로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을 수령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동헌과 내아 등에 함께 모여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외에 읍성의 성격에 따라 읍창, 군기고, 화약고, 환창 등의 창고시설과 향교와 함께 제사를 위한 시설로 문묘와 사직단을 두었다. 이외에 읍성의 규모에 따라 읍성 내에 읍시(시장)를 개설한 읍성도 있었다.
한반도에 있는 읍성은 대구읍성이 1906년 경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이 일본인들의 주장을 등에 업고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읍성을 철거한 그를 징계하려고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그를 비호하여 징계안을 철회하게 했다.}} 철거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읍성철거령에 의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읍성이 헐려버리고 말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도시들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도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제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있어서 한국의 방어거점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와 각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읍성을 없애버리면서 정신적으로 한국인들이 모일만한 구심점을 제거하여 식민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읍성은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 읍성들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거나 일부분만 남아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남아있는 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정도가 있다. 고창읍성은 입구만 평지이고 사실상 산성이라 도시를 만든다는 명분이 서지 않았고, 낙안읍성은 성 뒤편이 죄다 산이라서 새로 길을 내기 위해 성을 허문다는 명분이 전혀 서지 않아서 살아남았으며, 해미읍성의 경우는 내부를 텅 비워버리고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신사를 세우게 되면서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존 읍성들의 경우 원형을 보존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생활 중심지에 자리한 이유로 도시 개발에 따라 그 성곽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경우도 성문이나 성벽 일부 구간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다만 읍성 내부의 마을은 지명에 그대로 잔존한 경우가 많으며 현재 지적도상에서 성내리, 성내동과 같은 지명으로 해당 동리의 경계와 도로 가로망으로 당시 읍성이 있었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읍성이 일종의 관광자원에 해당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부 구간이라도 복원을 하거나 남아있는 성벽을 활용하여 공원으로 꾸민 경우도 있다.
중간에 전란이나 여러 다른 이유로 아예 읍치를 옮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고현성이나 고읍성이라고 따로 명칭이 붙기도 한다. 수원고읍성같은 사례가 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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