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의 역사
유전학에 대한 역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유전학의 역사(영어: history of genetics) 또는 유전학사(遺傳學史)는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및 에피쿠로스에 의한 공헌과 함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은 경험적으로 선사시대부터 생물의 특징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을 이용한 품종개량을 해왔다.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현대 유전학은 오스트리아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였던 그레고어 요한 멘델의 연구와 함께 시작되었다.[1] 유전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멘델은 1866년에 완두의 교배 실험에 관한 논문 〈식물 교잡에 관한 실험〉(독일어: 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 영어: Experiments on Plant Hybridization)을 발표하였는데, 현재는 생명과학 교과서에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정리되어 있다. 유전 현상에 대한 몇몇 이론들이 수세기 전부터, 멘델의 연구 이후에도 수십 년 간 제안되었는데, 멘델의 유전법칙 이전에는 혼합 유전과 같은 다양한 유전 이론이 통용되고 있었다.
멘델의 논문은 발표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1900년에 휴고 드 브리스(네덜란드), 카를 코렌스(독일), 에리히 폰 체르마크(오스트리아)에 의한 "멘델의 재발견" 과정에서 유전학의 기본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1903년에 월터 서턴이 "유전물질은 염색체 위에 존재하며, 염색체를 통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염색체설을 주장한 이후에[2] 유전학계는 유전물질의 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5년까지 멘델 유전학의 기본 원리가 다양한 생물체, 특히 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에 적용되었다. 1925년에 토머스 헌트 모건과 그의 동료들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멘델 모델을 더욱 발전시켰다. 모건은 "각각의 유전자는 염색체 위에 일정한 위치에 있으며, 대립유전자는 상동염색체의 동일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유전자설을 주장하였다.
실험적인 연구와 함께 수학자들은 집단유전학의 통계적 틀을 개발하여 유전학적 설명을 진화 연구에 도입하였다. 1928년에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폐렴균의 형질전환 실험을 하였고, 1944년에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더 정교하게 설계하여 유전물질이 DNA라는 것을 증명하였지만, 단백질이 유전물질일 것이라는 당시 학계의 강한 믿음 때문에 이 실험 결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1952년에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허시와 체이스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학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4]
유전자를 물려받는 기본 패턴이 확립되면서, 많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의 실험들은 염색체의 한 부분인 DNA에 유전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1953년에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 나선의 구조를 밝혀내고,[5] 1955년에 프레더릭 생어는 DNA와 아미노산의 관계를 규명하여 유전자 발현 기작을 밝혀내고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을 규명하였다.[6] 바이러스와 세균과 같은 새로운 모델 실험체에 초점을 맞춘 실험들과 그 성과들은 유전학을 분자유전학의 시대로 이끌었다.
다음 몇 년 동안 화학자들은 핵산의 염기 서열 분석 기술과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분석 기술을 개발했으며, 다른 연구자들은 핵산과 단백질의 관계, 유전 암호를 밝히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유전자 발현의 조절은 1960년대의 핵심 쟁점이었다. 1970년대에 유전공학을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조작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동안 많은 생물학자들은 전체 유전체(게놈)의 염기 서열을 밝히기 위해 대규모 유전학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