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파
위정척사를 앞세워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기까지 활동하던 정치 운동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 또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위정척사를 앞세워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기까지 활동하던 정치 운동이다.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 위정척사 사상(衛正斥邪 思想) 또는 척사위정 운동(斥邪衛正運動), 척사위정 사상(斥邪衛正 思想)이라 부르기도 한다.[1]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인 위정척사는 성리학의 주요 강령 가운데 하나로 송나라 주희의 화이론(華夷論)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 조선에서 위정척사가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난 시기는 정조 무렵으로 남인의 공서파와 신서파 갈등 과정에서 공서파가 천주교를 대표로 하는 서학을 받아들인 신서파 등 천주교도들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 삼았다.[3]
이양선이 출몰하고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조선은 쇄국을 표방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에 대한 배격 운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위정척사를 국론으로 표방하였다. 당시 서원 철폐로 흥선대원군과 극심한 갈등을 겪던 유학자들도 위정척사를 내세운 척화비 건립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4]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 국교 수립을 요구하는 서계(書契)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관례에 따라 서례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한다. 이 일로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일어나는 등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조선은 쇄국을 고수하였다.[5]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몰락 이후 운요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위정척사파 대신 개화파가 득세하게 된다.[6]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며 위정척사파와 개화파가 대립하였으나 위정척사파는 결국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동학의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앞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위정척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7] 을사늑약 이후 일어난 13도 창의군은 위정척사파 최후의 대규모 항쟁이었다.[8]
일제강점기에 들어 유교 자체가 낡은 사상으로 인식되면서 위정척사 사상 역시 독립 운동에서 비주류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임병찬 등의 대한독립의군부가 왕정복고를 내세워 위정척사파의 명맥을 이었으나[9]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과 같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1919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였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