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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吳尙源, 1930년 11월 5일 ~ 1985년 12월 3일[1])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겸 언론인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인간 문제를 파헤치는 소설을 썼다.[2] 한국 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상황을 배경으로 역경을 이겨 내는 강인한 인간형을 창조하여 전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3] 프랑스 행동주의 문학과 실존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의 전후 세대의 풍토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을 이루어 1950년대의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4] 대표작으로 〈유예〉, 〈모반〉이 있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1949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4]
등단 전에는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재학 중(전시 부산)에 이일, 정창범, 홍사중, 박이문, 김호 등과 함께 문학 동인 ‘구도’(構圖)에 참가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5]
1953년 신극협의회의 작품 공모에 장막극 〈녹쓰는 파편〉이 당선되었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예〉(猶豫)가 당선되어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2][4]
1960년 4·19 직후 신동문·구자운·박희진·서기원·송병수·이호철·이어령 등과 ‘전후문학인협회’를 결성했다.[6] 이 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다.[1]
1970년대 이후에는 작품 활동보다는 언론계에 열중했다.[주 1]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1970년 〈땀흘리는 한국인〉이라는 기행문을 연재했고, 1974년 논설위원이 되었다.[2]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중 1985년 12월 3일 지병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타계했다.
오상원의 문학적 특징은 한국 전쟁 후 세태의 사회적·도덕적 문제를 다루어 전후 세대의 정신적 좌절을 행동주의적 안목으로 주제화한 데 있다.[4] 한국의 전후 세대의 풍토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을 이루어 1950년대의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7]
불문학을 전공하여 프랑스의 행동주의 문학과 실존주의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균열〉(문학예술, 1955. 8), 〈증인〉(사상계, 1956. 8)은 그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2] 그가 쓴 논문들 중에는 소설가 앙드레 말로 관련 논문이 있다.
오상원은 보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통하여 휴머니즘을 추구하였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여 전후소설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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