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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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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르 다키텐(영어: Eleanor of Aquitaine, 오크어: Alienòr d'Aquitània, 프랑스어: Aliénor d'Aquitaine,1122년~1204년 4월 1일)은 아키텐의 여공작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왕비였으나 이혼한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왕비가 되었다.[1] 헨리 2세의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존왕의 모후이기도 하다. 12세기 낭만문학의 중심지 푸아티에 지방의 영향을 받아 음유시인과 문학자들의 후원자였고, 남프랑스의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 문화를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전파한 사람으로도 알려져있다.
엘레오노르 다키텐 Alienòr d'Aquitàn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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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라드공드 교회 벽화의 엘레오노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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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137년 4월 9일~1204년 4월 1일 |
전임 | 기욤 10세 |
후임 | 존 |
프랑크인의 왕비 | |
재위 | 1137년 8월 1일~1152년 3월 21일 |
대관식 | 1137년 12월 25일 |
전임 | 아델라이드 드 모리엔 |
후임 | 카스티야의 콩스탕스 |
국왕 | 루이 7세 |
잉글랜드인의 왕비 | |
재위 | 1154년 10월 25일~1189년 7월 6일 |
대관식 | 1154년 12월 19일 |
전임 | 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 |
후임 |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
국왕 | 헨리 2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22년 월 일(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출생지 | 푸아티에 보르도 |
사망일 | 1204년 4월 1일(1204-04-01) |
사망지 | 푸아티에 |
가문 | 푸아티에가 |
부친 | 기욤 10세 다키텐 공작 |
모친 | 에노르 드 샤틀르로 |
배우자 | 프랑스 왕 루이 7세 (1137년~1152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 (1152년~1189년)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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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퐁트브르 수도원 |
엘레오노르는 아버지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국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아키텐 지방의 영주들의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 루이 7세와 결혼한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루이 6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에 올랐다.
프랑스의 왕비 시절에 제2차 십자군에 참가했으나 그 원정은 가장 실패한 원정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결과로 끝났고, 이전부터 쌓여왔던 둘 간의 불화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는 루이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2]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3] 그러나 둘째딸 알릭스가 태어나자 더 이상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는 이혼에 합의한다.[4] 1152년 3월 11일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이 무효화된다.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은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간 반면에 결혼 전의 영지를 되돌려받기로 했다.
결혼 취소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인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 엘레오노르의 결혼 취소가 된 지 8주만인 1152년 5월 18일 둘은 결혼했다. 1154년 10월 25일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왕비가 되었다. 이후 13년 동안 헨리와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는데, 이중 아들 둘은 훗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사이는 결국 파탄났고, 심지어는 아들 헨리가 헨리 2세에게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 1173년부터 헨리 2세가 죽는 1189년까지 유폐되었다.
1189년 헨리 2세가 죽자 뒤를 이은 아들 리처드 1세가 곧 해방시켜주었고, 왕태후가 되자 아들이 제3차 십자군에 참전하면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다. 리처드가 죽은 이후에도 막내 아들 존의 치세까지 살았다. 자식 중에서 오래 산 사람은 존과 딸 카스티야의 왕비 엘레아노르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