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3년(조선 태종 13년): 양지현에 현감을 두게 되고, 치소를 광주목(廣州)의 추계향으로 이전하였다. 안성 등의 인근 고을과 함께 충청도에서 경기도에 편입되었고, 광주 관내의 고안(高安)·대곡(大谷)·목악(木岳)·제촌(蹄村)의 4개 부곡을 병합하였다.[1]
양지군읍지(1899)에는 다른 기록이 전해져 온다. 고려 시대에 읍내면 등촌(현 양지면 양지4리)에 등원군수(藤原郡守)가 터를 열었고, 조선 태조 대 개국 초기에 치소를 고서면 주곡리(현 고삼면 신창리)에 이전했다가 1470년(성종 1년) 주동면 금박산 아래로 이전해 읍호를 추계라 하고 현감을 두게 되었으며, 1면이 5, 6동에 불과하여 관할이 좁다는 이유로 죽산군의 4부곡을 편입하고 10개 면을 두었다고 한다.[2]
1500년(조선 연산군 6년): 이천과 합병하였다가 4년 후인 1504년에 복구되었다. 이때 정수산 아래에 치소를 두고 근방의 5개 마을을 통합하여 읍내면을 설치했다. 당시 관할 면은 11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