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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소련의 외교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문화어: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1872년 3월 31일 ~ 1952년 3월 9일)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노동 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소설가, 사회주의자이다. 어릴적 이름은 슈라(shura), 본명은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Домонтович, Aleksandra Mikhailovna Domontovich)이다. 별명은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1896년 스위스로 유학,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그해 일시 귀국하여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여자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여성 해방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멘셰비키 운동에 참여하여 여성 노동 계층을 구성하고, 여성 노동조합 운동과 여권 신장 운동, 자유 연애론 등을 펼치며 여성 해방과 복리후생 운동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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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주재 소련 공사 | |
임기 | 1923년 1월 31일 ~ 1926년 1월 31일 |
군주 | 호콘 7세 (노르웨이 군주) |
주석 | 블라디미르 레닌 (소련 국가원수 직무대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국가원수) |
이름 | |
별명 | 어릴적 이름은 슈라(shura), 본명은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Aleksandra Mikhailovna Domontovich,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Домонтович)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2년 3월 31일(1872-03-31) |
출생지 | ![]() |
사망일 | 1952년 3월 9일(1952-03-09)(79세) |
사망지 | ![]() |
국적 | ![]() |
학력 | 스위스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 국민경제학 전공 |
경력 | 정치인, 혁명가, 사회운동가, 외교관 |
정당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 소련 공산당 |
부모 |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 어머니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 |
배우자 |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이혼), 마슬로프, 파벨 드이벤코(동거혼, 1922년 결별) |
자녀 | 아들 미하일 콜론타이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국가 무신론 |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도 가담하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 정부와 인민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1917년 11월 후생복지담당 인민위원, 1919년 여성담당 인민위원, 1922년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는 남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보고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역설하였으며, 자유 연애론을 주장한 여성주의자였다. 콜론타이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과거의 가족 모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다.[1] 그리고 가사노동이나 자녀 양육을 사회가 맡아 여성들의 부담을 국가가 덜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그의 자유 연애론은 남성 볼셰비키들의 반대에 부딪쳤고, 1923년 주 노르웨이 공사가 되면서 소련에서 사실상의 추방을 당했다. 이후 주 멕시코 공사, 주 스웨덴 공사, 초대 주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였고, 여성해방 운동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갈등 및 알력으로 만년에는 외교관 생활과 소설 창작, 해외 강연 활동을 주로 하였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틀 안에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결혼과 연애, 성의 문제를 노동자 여성의 관점에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녀가 제시한 연애와 성, 결혼에 관한 새로운 도덕은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도 큰 논란을 야기하였다.[2] 한국의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 정칠성, 박정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는 《삼대의 사랑》, 《자매들》, 《붉은 사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