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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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기독교는 서기 1세기 사도 토마의 전도 활동에서 기원한 인도 케랄라의 전통적인 동방 기독교 교파이다.[1][2][3][4][5] 이들은 "나스라니인"이라고도 하는데, 시리아어 "나스라니"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에서 기독교인들을 부르는 용어 중 하나로써 케랄라의 성 토마스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처음 15세기 동안 그들은 순종하고 국가의 국민과 통치자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들 자신의 지도자를 가졌다. 서기 19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판타이누스는 이 기독교인들을 방문하였다.[6] 그는 그들이 히브리어로 된 마태오의 복음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서기 522년경, 이집트 동부 시리아 수도사인 코스마스 인디코펠레우스테스(Cosmas Indicopleustes)가 말라바르 해안을 방문하였으며, 그의 저서인 Christian Topography에서 후추가 자라는 말레라는 나라의 기독교인을 언급하였다.[7][8][9] 이것은 6세기까지 이 기독교인들이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 883년, 잉글랜드의 웨식스 국왕 앨프레드는 쉐르본의 주교인 시겔름을 통해 인도의 마르 토마 기독교인들에게 선물을 보냈다.[10] 서기 1292년경에 중국에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남부 케랄라를 방문하였으며, "그들 중에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있지만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이다"라고 언급하였다.[11][12]
서기 345년에 에데사의 기독교인들이[13] 카나의 토마스의 지도력 아래 케랄라에 도착했고 825년에 또 다른 집단이 이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에서 그들을 방문한 자신의 주교가 있었다. 성 토마스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환영했지만, 이 주교들은 그들을 복종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성 토마스 기독교인들은 16세기까지 동방 기독교에서 온 주교들과 독립적인 집단으로 남아있었다.
성 토마스 기독교인들은 1498년에 포르투갈인이 인도에 도착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포르투갈인은 라틴어 의식 천주교의 후원 아래 지역 사회를 장악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지역 사회에 영구적인 균열이 생겨났다.[14][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