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Nuel92/찰디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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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디란 또는 찰도란(페르시아어: چالدران, 튀르키예어: Çaldıran) 전투는 1514년 8월 23일에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그 결과 오스만측은 아나톨리아 동부와 이라크 북부의 통치권을 즉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양대 이슬람계 제국 사이에서 41년에 이르는 파괴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쟁은 1555년의 아마시아 조약으로 끝이 났다. 오스만이 승기를 잡았던 반면 사파비조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파비조는 아제르바이잔, 루리스탄, 케르만샤 지역 등 시아파가 주류였던 페르시아의 대도시권역을 잃었으나, 곧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동부와 이라크 지역의 상실은 영구적이었다.
찰디란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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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 |||||||
찰디란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전투가 일어난 곳에 세워진 기념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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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 | 사파비 제국 | ||||||
지휘관 | |||||||
셀림 1세 | 이스마일 1세 | ||||||
병력 | |||||||
60,000 명[2], 100,000 명[3][4][5], 212,000 명[6] 등의 설이 있음. 이 군대 중 일부는 포병대와 예니체리 화승총병들이었다.[5] | 12,000 명[6], 40,000 명[7][3][5][8], 55,000 명[2], 80,000 명[4] 등의 설이 있음. | ||||||
피해 규모 | |||||||
2,000 명 이하 | 약 5,000 명 |
찰디란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6만에서 20만 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상대적으로 장비가 더 좋았다. 사파비 제국의 군대는 약 4만 명 가량이었다. 이스마일 1세는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될뻔했고, 전투 이후에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궁정에 틀어박혔다.[9] 또, 이스마일의 아내들 중 2명이 셀림 1세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후일 이스마일의 뒤를 잇는 타흐마스프 1세의 어머니인 타즐루 하눔이다. 타즐루 하눔은 셀림 휘하의 귀족에게 선물되었다.[3]
이 전투는 시아파 키질바쉬의 무르시드가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렸다는 점,[10]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의 국경이 완전히 결정났다는 점, 쿠르드 수령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파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사이에서 충성의 대상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