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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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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沙氏)는 백제의 성씨이자 백제의 유력 가문인 대성팔족 중 하나이다. 본래는 사택(沙宅/沙吒)씨이거나 같은 성씨일 강능성이 존재한다.
이들은 주로 백제 내에서 고위직을 얻었으며 정치, 군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2]
백제 말기인 의자왕 때는 왕족 중심의로 국정을 운영하자 이들은 중앙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결국 지방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3]
상세
사비(泗沘) 지방에 기반을 가진 유력한 세력집단이다.
금강하구의 재지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사씨세력은 서해와 남해로 이어지는 재해권을 장악하여 대중국 교류와 대왜 교류에 관여하며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근초고왕에 의한 가야 7국 원정 장군 사사노궤(沙沙奴跪)로 처음 등장한다.[4] 가야 원정 이후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기반과 공부수취를 관장하는 권한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5] 근초고왕 원정 이후 가야 지역은 백제와 왜 사이의 교역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6] 이 지역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사씨는 일찍부터 중용되었을 것이다.[7]
사씨 세력은 백제 왕실의 웅진 남천를 계기로 하여 신진지방세력으로서 중앙의 지배귀족으로 진출하였으며, 성왕이 사비로 남천할 때에는 성왕의 중요한 지지세력으로서 정치적 배경세력이 되고,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대성팔족(大姓八族)의 모두(冒頭)를 장식하는 백제 제일의 귀족세력으로 그 기반을 굳혀 나간 것으로 보인다.[8]
사씨 세력의 저력은 백제의 위기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잡혀간 대좌평 사택천복을 통해 백제 멸망 직전까지 사씨 세력이 최고 직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존성에서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타상여의 행적을 통해 사씨 세력이 백제부흥운동도 이끌었던 세력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이후 왜로 망명한 사택소명은 왕족 여자신과 동등한 대금하라는 관위를 하사 받았는데 패망 국가의 유민이었지만 사씨는 당시 최고 귀족세력으로 왜 조정에서도 인식하였고, 이와 연계하여 천황으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망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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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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