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1917–1979)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박정희(朴正熙,[4]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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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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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1963년) | |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 |
임기 | 1963년 12월 17일~1979년 10월 26일 |
국무총리 | 최두선(1963년~1964년) 정일권(1964년~1970년) 백두진(1970년~1971년) 김종필(1971년~1975년) 최규하(1975년~1979년) |
전임: 윤보선(제4대) 후임: 최규하(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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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917년 11월 14일(1917-11-14) |
출생지 | 일본 제국령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사곡동 |
사망일 | 1979년 10월 26일(1979-10-26)(61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
매장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본관 | 고령 |
학력 | 육군대학 |
정당 | 민주공화당 |
부모 | 박성빈(부), 백남의(모) |
배우자 | 김호남(1936년~1950년), 육영수(1950년~1974년) |
자녀 | 아들: 박지만, 딸: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
종교 | 무교[1](친불교[2]적 행보[3]) |
서명 | |
군사 경력 | |
복무 | 만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44년~1945년(만주국군) 1945년~1946년(한국광복군) 1946년~1949년,1950년~1963년(대한민국 육군) |
소속 | 민주공화당 |
최종계급 | 만주국군 : 중위(中尉) 대한민국 국군 : 대장(大將) |
지휘 | 육군 제9보병사단 참모장 육군 제5보병사단 사단장 육군정보학교 육군 제7보병사단 사단장 육군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참전 | 중일 전쟁 여순 사건 (남조선로동당 14연대) 6.25 전쟁 |
서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1945년 9월 21일 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5] 1946년 5월 10일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6]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순사 출신 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7] 반이승만파이던 남로당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심 판결 이후 남조선로동당 조직구도 윤곽을 증언한 뒤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방첩대장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조치로 풀려난다.[8] 이후 백선엽 국장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전쟁때 다시 현역 군인으로 복귀한다.[9]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9월 말에 일어난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같은 해 10월 16일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