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9세
프랑스의 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루이 9세(Louis IX), 통칭 "용맹왕(le Prudhomme)"은 1214년 4월 25일 푸아시에서 태어나 1270년 8월 25일 튀니스 근처 카르타고에서 사망한 카페 가문의 프랑스 왕으로, 보통 생 루이(Saint Louis)로 더 많이 불린다. 루이 9세는 1226년부터 1270년 사망할 때까지 43년이 넘는 기간을 통치했다. 생전에 성인으로 여겨진 루이 9세는 1297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이 9세 Louis I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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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 | |
재위 | 1226년 11월 8일 - 1270년 8월 25일 |
대관식 | 1226년 11월 29일 랭스 대성당 |
전임 | 루이 8세 |
후임 | 필리프 3세 |
이름 | |
별호 | 성왕(聖王)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14년 4월 25일 |
출생지 | 프랑스 푸아시 |
사망일 | 1270년 8월 25일(56세) |
사망지 | 북아프리카 튀니스 |
가문 | 카페 왕가 |
부친 | 루이 8세 |
모친 | 블랑카 데 카스티야 |
배우자 | 마르그리트 |
묘소 | 생드니 대성당 |
프랑스의 44대 왕이자, 카페 직계 왕조 출신으로는 9대 군주인 루이 9세는 루이 8세 "사자왕 루이"와 블랑슈 드 카스티유 왕비의 네번째, 혹은 다섯번째 자식이자 알려진 것으로는 두번째 아들이다. 루이 9세는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 왕비로부터 어린 시절 전반에 걸쳐 매우 엄격하고 독실한 교육을 받았다.
형제들 가운데 살아남은 큰 형이던 루이 9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루이 9세는 1226년 11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축성받았으나, 왕대비인 어머니가 루이 8세의 유언에 따라 새 군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성인이 되자 루이 9세는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가문 사이의 대립을 끝내고, 왕국 내부의 확장을 중시하여, 노르망디, 앙주, 투렌, 멘, 푸아투에서 왕권을 강화하며 특히 보케르와 카르카손 판관령을 합병했다.
루이 9세는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받아 정신적, 정치적 힘이 한 개인에게 강생될 수 있다는 이념을 세우는 데 기여한 통치를 펼쳤다. 그는 공공복지라는 개념을 위해 봉건제의 오용을 완화하였으며, 군주를 "지고의 심판자"로 보이게끔 왕도를 발전시켰다. 이 같은 방법으로 루이 9세는 프랑스를 오직 왕과 봉신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봉건 군주국에서 국가 수반으로서의 왕과 국민의 관계에 바탕을 둔 근대 군주국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했다.
루이 9세는 실로 국민들이 정의로운 힘을 따르는 왕국을 후대에 물려주고자 한 개혁왕이었다. 그는 왕의 명으로 40일간 사적 전쟁을 금하는 "40일왕(quarantaine-le-roi)" 제도를 다시끔 도입하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따르고, 고문을 완화하며, 신명 재판과 사적 복수를 금하고, 재판결을 위해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격쟁(supplicatio) 제도를 도입했다. 본인의 명성이 왕국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전해지며, 루이 9세는 유럽의 여러 왕국들 사이를 중개하기도 했다. 루이 9세는 또한 왕국에 단일 통화를 도입하였으며, 훗날 의회와 감사원이 될 기관들의 창립을 추진하였다. 매우 독실했던 루이 9세는 여러 교회, 수도원, 병원을 건립하고 빈자들을 도우며, 몽골 군주들의 개종을 도모하기도 했고, 소르본 대학교 개교를 지원했으며, 수난 성유물들을 얻어 이를 보관하고자 1242년 생트샤펠을 건설했다.
루이 9세는 1297년 8월 11일 생 루이 드 프랑스(saint Louis de France)라는 이름으로 손자 필리프 4세 미남왕의 추진을 받아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이 9세의 전례 축일은 그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8월 25일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프랑스 경제, 지식, 예술 재부흥을 일으킨 군주로 평가받는 루이 9세는 할아버지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손자 필리프 4세 미남왕과 함께 세 명의 위대한 카페 직계 군주 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