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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지역 중 하나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라자라타(싱할라어: රජරට, 타밀어: ரஜரட)는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13세기 초까지 약 1,700년 동안 스리랑카 섬의 세 역사적 지역 중 하나였다.[1] 탐바판니, 우파티사 누와라, 아누라다푸라 및 폴론나루와를 포함한 여러 고대 도시는 연속 통치자들에 의해 이 지역의 수도로 설립되었다.[2] 라자라타는 라자(왕)의 직속 통치를 받았으며, 말라야라타와 루후누라타라는 다른 두 지역은 왕의 형제인 마파(Mapa)와 에파(Epa)가 통치하였다. 13세기의 마가 침공은 라자라타의 종말을 가져왔다.[3]
라자라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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රජර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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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탐바판니 우파티사누와라 아누라다푸라 시기리야 폴론나루와 | |||
정치 | ||||
정치체제 | 싱할라 군주제 | |||
라자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05년 기원전 505년 ~ 기원전 504년 기원전 504년 ~ 기원전 474년 기원전 474년 ~ 기원전 454년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7년 기원전 377년 ~ 기원전 367년 982년 ~ 1017년 1055년 ~ 1110년 1153년 ~ 1186년 1187년 ~ 1196년 1215년 ~ 1232년 | 비자야(초대) 우파티사 판두바스데바 아바야 티사 판두카바야 마힌다 5세 비자야바후 1세 파라크라마바후 1세 니샨카 말라 칼링가 마가(말대) | |||
역사 | ||||
• 탐바판니 시대 | 기원전 543년 ~ 337년 | |||
• 아누라다푸라 시대 | 기원전 377년 ~ 서기 1017년 | |||
• 폴론나루와 시대 | 1055년 ~ 1232년 | |||
지리 | ||||
위치 | 스리랑카 | |||
인문 | ||||
공통어 | 싱할라어 | |||
민족 | 싱할라인 | |||
종교 | ||||
국교 | 불교 | |||
기타 종교 | 힌두교 자이나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스리랑카 |
라자라타의 첫 왕국은 기원전 543년 비자야에 의해 세워졌다.[4] 그는 칠라우와 만나르 사이의 말바투 강 삼각주 근처에 정착했다. 현지 신화에 따르면 비자야 왕자는 라자라타를 장악하기 위해 현지 공주 쿠베니와 결혼하였으며,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모든 지역 지도자들을 배신하고 살해하였다.[5] 그의 사망 후 수도는 말바투 오야를 따라 시골로 이전되었다. 강은 농업에 이상적이었다. 처음 세 개의 수도인 탐바판니, 우파티사 누와라, 아누라다푸라가 말바투 오야 근처에 위치해 있다. 한때 지역 야크샤와 싱하 부족의 후손이었던 판두카바야 왕은 아누라다푸라에 안정된 왕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는 섬의 여러 지역에 있는 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6]
라자라타의 수도:
비자야 왕자와 그의 일족은 말바투 오야 삼각주 근처의 탐바판니에 정착하였다. 마하밤사에 따르면, 비자야 왕자와 판두카바야 왕의 치세 사이에 다양한 집단이 인도에서 왔으며 말바투 오야를 따라 자주 정착하였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 왕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다. 대부분의 정착지는 강과 저수지 근처에 위치하였으며, 물은 농업용으로 사용되었다. 다투세나에 의해 만나르 구와 요다 웨야 구[8] 바부니야 구의 에로파타나, 아누라다푸라 구의 파다위야 구 및 모갈라나 2세에 의해 물라이티부 구까지[9] 스리랑카의 황금 문명의 범위는 바니 숲의 남쪽 경계로 퍼졌다. 울창한 바니 숲은 숲의 남쪽 경계 위에 있는 식민지 개척자들의 장벽 역할을 하였다.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자이언츠, 파다비야, 미나르리야, 칸테일, 마하빌라치치야, 타보와, 칼라)들은 초기 라자라타 정착지의 증거이다.
강 근처의 초기 정착지 :
세 부분의 경계 (라타)[10]
1215년 칼링가 마가는 24,000명의 군대로 라자라타를 침공하였다. 라자라타를 정복한 후 마가는 폴론나루와에 수도를 세웠으며, 그 다음 말라야라타에 자신의 힘을 확장하였다. 비자야바후 3세(1220-1224)의 담바데니야 왕국이 부상하는 사이 마가는 말라야라타의 통제권을 잃었다. 싱할라 윈주민들은 폴론나루와에서 마가 정부에 저항하였다. 싱할라인들은 수바와 산카를 포함한 군대 장군 아래 야파후와와 강가도니를 포함한 접근하기 어려운 마을, 요새 및 산 주변에 모였다.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판디아 군대는 자프나 반도에 관리 센터를 세웠다. 이곳은 뚫을 수 없는 바니 숲으로 더욱 안전하고 고립된 장소였다. 후에 라자라타는 파라크라마바후 2세 (1236-1270) 왕에 의해 합병되었으며, 그의 힘은 루후나, 중앙 언덕, 라자라타와 바니까지 확장되었다.[11]
싱할라인들은 라자라타에 행정 센터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남인도에서 온 침략자들과의 끊임없는 전투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리 센터는 싱할라인에 의해 라자라타에서 멀어졌다. 무굴 제국에 의해 남인도에서 판디아가 패배하자 스리랑카의 타밀 세력은 약화되었다. 마두라이의 마지막 판디아 통치자는 1323년 델리 술탄국의 군대 장군 말리크 카푸르에 의해 패배하고 추방되었다.[12] 판디아의 몰락은 스리랑카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다음과 같은 이벤트로 이어진다.
또한 13세기 이전의 라자라타 지역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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