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환 (1866년)
일제강점기의 은행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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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환(1866년 함경남도 함흥 ~ 1927년)은 구한말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실업인, 은행가였다. 북선상업은행 대주주이자 은행장이었다.
1866년에 함경남도 함흥출신이나 조상은 원래 경상남도 동래에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는 유일(惟一)이며 6척 장신이라고 한다.[1]16세때부터 잡화상 등을 시작하였으며 기반을 다져 점차 해산물 곡물등을 도매하면서 사업을 널펴갔다. 1908년 7월에는 지방 교육사업에 금전을[2], 1910년 1월에는 함흥 화재로 인하여 굶주리는 지방민들을 위해 미곡을 쾌척하여 함흥 지방에서의 명성이 높았다.[3] 이러한 공헌으로 인해 연해천 교량에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4]. 1909년 6월에는 함경도 굴지의 방직공장을 함흥에 설립하고자 추진하였다.[5] 또한 1913년에는 당시 함흥군 오로리 원평장 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7백 50원을 김경집, 한시은과 함께 도맡아 기부하였다.[6] 사업욕이 강한 그는 1917년에 부동산,건어물,토지개발업 창고업 등을 하는 대성사를 설립하였다. 한편, 1차세계대전 말에 제정러시아,독일화페에 투자하여 큰 손해를 보았으나 김승환은 이미 거상으로 폭넓은 사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루불 사업에 지장은 없었다.[7] 1918년에 일본인들의 원산에 대량진출에 대항하여 선각 민족사업가들과 함께 북선상업은행을 설립하였다. 당시 자본금은 50만원이었으며 총발행 주 1만주, 주당액면가 50원인 상황에서 김승환은 1,625주를 소유하여 대주주로서 1918년 12월에 53세에 개점 은행장에 취임하였다.[8] 북선상업은행은 순수한 민족자본의 은행이었으며 함흥의 상거래 특징과 지리적 특징상 당시 일본인들이 넘볼 여지가 없었다.[9] 두취 김승환은 북선상업은행을 관북 지방 이외에 영흥[10], 단천[11] 등지에 지점을 설립하였다. 한편, 계속 건어물 등을 부산, 동래, 일본지역까지 수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으며 또한 성격이 원만하여 은행장 재직시 특유의 인화력으로 은행을 원만히 운영하였다.[12] 호탕한 성격으로서 가끔 은행원 전부를 고급 요리집에 모아 모두에게 기생 하나씩을 안겨주면서 호탕히 놀아보라고 파티를 열어 주었다.[13] 말년에 함흥에 최대 설비 의 상공정미소를 세워 함흥 평야의 농업발전에 기여했으나 이는 1945년 진주한 소련군의 화재로 소실되었다[14].192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에는 화려한 7일장이 치뤄졌다[15]. 장남 김기정 등이 있었으며 자손들의 대부분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등지에 거주 중이며 북한에도 일부 남아있다.[16]
큰 아들 김기정 외 다수의 자식들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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