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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목회자 (1937–2024)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김명혁(金明赫, 1937년 6월 4일~2024년 2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신학박사 출신이며, 개신교 장로회 목사 겸 대학 교수이자, 개신교 교육인이다. 개신교 순교자 김관주 목사의 아들이다.
총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 담당 교수를 했으며, 합동신학교 교장과 교육부 인가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에서 그는 어거스틴 신학연구와 선교신학에 관한 권위자이기도 하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를 창립하여 15년동안 회장과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1] 또한 강변교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원로목사로 있으면서 대한민국 교회의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은퇴후에 여러 교회와 교도소를 방문하여 전도하며 사랑의 실천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들로는, 자신의 부친 김관주 목사, 이외에도 한경직 목사, 김치선 목사, 손양원 목사, 그리고 주기철 목사를 생전에 언급 및 거론했었다.
남양 (南陽) 김명혁(金明赫, 1937년 6월 4일) 박사는 순교자 김관주(金冠柱, 1905년 9월 25일-1950년 6월 23일)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서 2살부터 9살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10살부터 11살까지 평양에서 자랐는데 11살 때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로 38선을 캄캄한 밤에 뛰어 넘어서 월남하였다. 총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를 했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에서 그는 역사신학에 관한 여러 권의 저서를 썼으며 어거스틴 연구에 관한 권위자이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설하여 15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명예회장이다. 또한 강변교회를 창립하여 현재 원로목사로 있으며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음이 따뜻한 교수이며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목회자이다.[2]
남양은 1937년 6월 4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호적은 그의 부친의 호적과 같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이다. 그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존경받는 인물로서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에서 아버지 김현하 영수와 어머니 김정숙 권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관주 목사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법학과를 중퇴하고 일본 도쿄 신학교를 나왔다. 그는 당시 의학을 공부하던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그는 조선국에 귀국하고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부목사로 시작하여 후에 담임목회 사역을 9년 동안하였고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자주 투옥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38선 이북에 들어선 공산 정권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소련이 참여하는 정치에 협조할 것을 강요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압력이 가해졌다. 그는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는 데 참여했고 이후 조선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공산 정권은 결국 협조하지 않는 그를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체포해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데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도록 처리했고, 그는 1950년 6월 23일경에 순교하였다.
남양은 이런 그의 아버지의 순교신앙을 몸에 지니면서 자랐으며 후에 그의 삶도 순교적 신앙으로 살게되었다. 남양은 어릴적에 안주에서 캄캄한 수요일 밤 할머니와 온 가족이 등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예배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할머니(김정숙 권사)는 한평생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 인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다. 남편은 영수가 되었다. 남양의 부친인 맏아들은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장로와 목사가 되었다.
남양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은 평북 신의주였다. 그의 부친 김관주 목사가 1938년부터 8∼9년 동안 신의주 제2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와 함께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살 때부터 한평생 한 목사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한 목사를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한 분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신앙적 가르침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부친이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갔지만 어머니와 함께 감옥 담장 밖에서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소리쳐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면서 순교신앙을 몸에 지니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초등부 시절을 보낸 곳은 평양이다. 부친은 1946년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고 47년부터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후에 평양외각에 있는 사동 탄광에 갇혀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그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강 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김명혁이 그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다. 김명혁이 만 11살 때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를 만나서 인사를 나눈 다음 여기서는 주일을 바로 지키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그를 한참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너없이는 못살아 하시면서” 말씀하시며 울시면서 가라고 허락을 하셨다. 결국 그는 48년 8월 영적인 고향인 평양을 등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인민군에게 모두 잡히고 그만 혼자서 산과 들과 강을 뛰어넘어서 미지의 땅 남한으로 달려왔다. 그는 두려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약간의 스릴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서 만난 어느 청년의 도움으로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 역에 도착하여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7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남양은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 집에서 살게되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과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가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방산 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를 열심해서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월남한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3년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 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대구에서 부흥회를 여러곳에서 인도하셨던 이성봉목사님의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12번이나 받았는데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라고 대답은 하군 했는데 서너번 후에는 묻지도 않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라고 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시곤 했다고 김명혁 목사는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면서 김치선 목사 밑에서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김치선 목사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를 사모하는 것과 전도의 영적 유산을 물려 받았다.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2만 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주소서” 라는 기도의 음성을 듣고 왕십리 벌판에서 전도를 하였다. 그는 이미 고 3때 무조건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벌판에서 전도하여 학생이 60명 어른이 40명이 모이는 천막에서 개혁교회를 하였는데 교회의 이름을 한양제일교회라고 하였고 2년 동안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고 3때 한경직 목사를 만나서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교에서 무엇을 전공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는데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해 주셔서 결국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신학 연구와 목회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균형 잡힌” “양면적인” “포용적인” “관용적인” 사고의 틀과 안목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 시절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과 같은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보람된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던,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그들은 문리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 결과 “새 생활운동”을 시작하여 사회에 도전을 주었다고 한다.
남양은 1961년 대학을 졸업한 후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교수진은 박형룡,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강태국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한철하 박사로부터 학문적 도전과 감화를 많이 받았다. 교회사를 사건 위주가 아닌 주제와 흐름 위주로 연구하게 된 것이었다. “어거스틴 연구” 강의 시간에는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을 영문으로 읽으며 그의 신학 방법론과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들을 다루었는데 그 당시 그에게 많은 감동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어 넣어 주었다. 결국 그는 후에 어거스틴을 전공하며 석사 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총회신학교에서 두 학기 공부를 마치고 196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신학교로 유학 가서 신학수업을 계속했다. 돈이 부족해서 비행기를 타는 대신 배를 타고 두 주 반 동안의 항해 후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즉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이틀 동안 밤낮으로 달려가서 훼이스 신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교장 매크레이박사의 “교회사” 강의를 잘 듣고 공부를 잘 해서 칭찬을 받았고, 교내 인쇄소 책임자의 신임을 얻어서 인쇄소에 가서 일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도 했다.
그는 1964년 훼이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B.D.)를 얻은 후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신학석사 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했다.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이론” 이었는데 이는 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했다. 1966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신학석사 학위(Th.M.)을 얻으며 졸업한 후 뉴 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교 신학원에 입학하여 또 다시 신학석사 과정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는데.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 이었다. 그는 1972년 12월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논문을 완성한 후 1973년 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써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다. 그리고 마지막 1년은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연구하게되었는데 그의 삶과 목회에 깊은 영향을 받게되었다.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가을에 귀국한 후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대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며 교육목사로 목회한 일이 있었다. 그의 지도로 목회와 선교에 헌신한 제자들로는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이진,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등이 있었다. 후암교회 사역을 마치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979년 2월 18일까지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하였다. 1980년 4월 6일 강변교회를 설립하여 28년 동안의 강변교회의 목회를 한 후에 2008년 1월 13일에 은퇴를 하였다. 2024년 2월 18일 춘천에 있는 산천무지개교회에 설교를 가던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소천하였다.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보다는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도 기여하였다. 역사적 선교학적 접근에서 그의 신학사상의 평가가 재조명되어야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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