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순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1872–1961)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갑순(金甲淳, 일본식 이름: 金井甲淳가나이 고슌, 1872년 5월 22일 ~ 1961년 6월)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 자본가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부를 축적하여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부호로 성장했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공주군, 논산군, 아산군, 노성, 대전 등지에 대규모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1930년말 대전시내의 3분의 2가 한때 김갑순의 땅이었다. 교육자 윤치오의 사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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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공주군청의 관노로서 잔심부름하다가 충청남도관찰사의 첩과 의남매를 맺게 되어 그 인연으로 1900년 초 내장원의 하급 관료로 발탁돼 1902년 부여군수가 된 뒤 노성군수와 공주군수, 임천군수, 김화군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공주군수로 다시 부임하였으며, 한일합방 직전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이후 관직 생활 중 땅 투기, 세금 횡령 등을 이용해 거액의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1910년 10월 한일병합조약 이후에는 아산군수를 잠시 지냈다가 사퇴, 토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되고 공주, 논산 일대의 황무지를 개간, 소택지 매입 등으로 시장을 만들고 자동차 사업, 수리 사업 등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1932년에는 김갑순 소유의 땅으로 충청남도청이 이전하면서 김갑순은 지가 상승으로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경성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다. 유성온천의 개발 초기 투자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의 공주 지역의 갑부로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김갑순은 부인이 10명이였다.[2] 공주 출신. 본관은 김해이고 호는 동우(東尤)이다. 본명은 순갑(淳甲)이었으나 고종이 갑순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