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섬유의 역사
비단 생산과 무역의 역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견직물 생산은 신석기 시대 중국의 양사오 문화 (기원전 4천년대)에서 기원했다. 견직물 생산이 시간이 흘러 전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이뤄졌지만, 그 생산 기술은 중국에 한정되어 있었다가 기원전 114년에 비단길이 열리면서 퍼져나갔으며, 그럼에도 중국은 수천 년간 견직물 생산을 사실상의 독점을 유지했었다. 중국 내 견직물 사용은 의류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견직물은 집필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부문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견포의 색상은 사회적 중요성을 띠기도 했으며, 당나라 시대 동안에는 사회 계급에 대한 중요한 안내 역할을 하였다.
견직물은 최소한 서력 기원 전에 일본에서 생산되었고, 서기 552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가까스로 누에나방의 알을 구하여 양잠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아랍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시기에 견직물 생산을 할 수가 있었다. 양잠업의 전파 결과로, 중국의 견직물 수출은 중요도가 덜해졌으나, 여전히 고급 견직물 시장에 대한 독점은 유지하였다. 십자군은 서유럽으로 견직물 생산 기술을 들여왔고, 그 중에서도 여러 이탈리아 국가들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으로 견직물을 수출하며 경제 번영을 이뤘다. 견직물 제조 기술의 발전 역시도 중세 유럽(5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서 이뤄졌으며, 물레 같은 장치도 이 시기에 처음 모습을 선보였다. 자체적인 견직물 생산을 이뤄내려던 다른 유럽 국가들의 대부분 시도는 실패로 끝났음에도, 16세기 기간,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함께 성공적인 견직물 산업을 구축해냈다.
산업 혁명은 유럽의 견직물 산업 대부분을 바꿔 놓았다. 면화 방적기이라는 혁신 때문에, 면화는 제조 비용이 저렴해졌고, 면화 생산이 제조업자들의 주요 관심이으로 이어지며, 비용이 많이 들던 견직물 생산을 꺼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직조 기술은 견직물 옷감 생산의 효율성을 높였는데 그 중 하나가 자수 도안이 있는 극도로 세밀한 견직물 생산을 위해 고안된 자카드 문직기였다. 이 시기의 일부 누에병은 비단 생산이 쇠퇴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프랑스가 그랬으며 프랑스는 이때의 피해로 산업이 다시는 완전히 회복을 이뤄내지 못했다.
20세기에, 일본과 중국 등은 견직물 생산에 있어 초창기의 지배적 역할을 되찾았으며, 중국은 다시 한번 최대 견직물 생산국이라는 지위를 찾아왔다. 값이 싸고 대체하기도 편하던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 새로운 견직물 모방품의 등장은 전세계의 만연한 견직물 생산을 감소시켰다. 견직물은 지난 역사적 전성기 때와 비교했을 때 중요도가 크게 떨어진 가운데, 현재는 다시 한번 사치품이라는 평가를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