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 (1600-1649)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찰스 1세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1])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다. 1625년 3월 27일 즉위하여 1649년 처형될 때까지 재위하였다.
찰스 1세 Charles 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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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왕 | |
재위 |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
대관식 | 1633년 6월 18일 |
전임 | 제임스 6세 |
후임 | 찰스 2세 |
잉글랜드 국왕 | |
아일랜드 국왕 | |
재위 |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
대관식 | 1626년 2월 2일 |
전임 | 제임스 1세 |
후임 | 잉글랜드 호국경 추밀원 |
이름 | |
휘 | 찰스 스튜어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00년 11월 19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왕국 던펌린 |
사망일 | 1649년 1월 30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
가문 | 스튜어트 |
부친 | 제임스 6세/1세 |
모친 | 덴마크의 앤 |
배우자 | 헨리에타 마리아 |
자녀 | 7명(찰스 2세, 제임스 2세 포함) |
종교 | 성공회 |
묘소 | 런던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
스튜어트 왕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03년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가 된 뒤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1612년 웨일스공이었던 형 헨리 프레더릭이 사망하자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와 혼담이 오갔으나 1623년 직접 스페인을 방문하여 8개월간 머물며 진행된 협상 끝에 결렬되었다. 1625년 즉위 직후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하였다.
즉위 첫 해부터 찰스 1세는 군주의 특권을 제약하려는 잉글랜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의 간섭없이 전제군주로 통치하고자 하였으나 의회는 동의 없는 징세 등의 행위를 폭정으로 인식하였다. 프랑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은 뒤 로마가톨릭을 옹호한다는 평이 돌면서 개신교 교도들의 반감이 커졌는데 특히 장로제를 기반으로 하는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반발이 컸다. 찰스 1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서 성공회의 고교회 운동을 지지하였으나 30년 전쟁이 벌어지는 유럽 대륙의 개신교 군대에 대한 지원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찰스 1세의 본심을 의심하였다. 장로제를 채택한 스코틀랜드 교회에게 성공회의 관례와 주교제를 강요하려는 시도는 주교 전쟁으로 이어졌고 스스로의 몰락을 불러오는 단초가 되었다.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의 갈등은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폭발하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회는 원두당을 결성하고 왕당파인 기사당의 군대와 싸웠다. 개전 초기에는 전쟁의 향방을 알기 어려웠지만 1645년 의회군이 신형군을 결성한 뒤 전세가 기울어 찰스 1세는 옥스포드에서 퇴각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그나마 스튜어트가에 온정적이었던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였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 사이의 오랜 협상 끝에 런던의 장기의회로 넘겨졌다. 찰스 1세는 의회의 입헌군주제 요구를 거부하다가 1647년 11월 잠시 탈출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아일오브와이트에 투옥되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 언약도가 왕당파로 돌아서며 다시 내전이 벌어졌지만 잉글랜드의 신형군은 1648년 말까지 잉글랜드 내의 봉기를 진압하며 내전을 종결지었다. 의회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여 1649년 1월 처형하였다. 이후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하였다. 잉글랜드 연방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후 급속히 구심력을 잃었고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찰스1세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이후 잉글랜드 성공회에 의하여 시성된 유일한 국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