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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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문서는 일본의 영화 및 제반 산업에 대해 설명한다.
일본의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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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수 | 3,437개 (2015년)[1] |
주요 배급사 | 도호 37%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재팬 11% 도호 도와 10% (2013년)[2] |
관객수 (2015년)[1] | |
총 관객수 | 1억 6663만 명 |
매출액 (2015년)[1] | |
총 매출 | 2171억 1900만 엔 |
자국영화 매출 | 1203억 6700만 엔 |
황금기의 마지막 해인 1958년의 11억 2,270만명이란 연간 영화 총관객수가 12년 후인 1970년에는 2억 5,300만명으로 되었다. 같은 해 7,670개이던 영화관이 3,246개로 줄어 들었다. 1969년과 1970년 한 해 사이에 자그마치 3,000만명의 관객감소와 400개의 영화관 폐쇄가 있었는가 하면, 일본영화의 대부분을 생산해 내던 5대 제작사(東映·東寶·松竹·日活·大映)중 다이에이(大映)가 닛카쓰(日活)와 배급공동화를 위한 배급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얼마후 해산됐으며, 다이에이는 1971년 11월에 전사원(全社員)을 해고, 사실상 영화제작사무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의 제작량을 보면 5대제작사가 132편, 독립프로덕션이 22편(1971년 11월말 현재)으로 대제작회사보다 소자본(小資本)에 의한 독립프로덕션이 활발한 제작활동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른바 '에로덕션(외설영화)'이나 폭력영화 등이 다량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성인용의 심야 극장이 성행한다. 대제작사의 붕괴현상을 비롯한 일본영화산업의 쇠퇴현상은 무엇보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1995년 기준 9,700만대), 성행하는 레저 붐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일본영화가 예술적인 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의 <라쇼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때부터이다. 이어 몇 개의 작품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할복(割腹)>(1963) 등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무사도 잔혹이야기>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리고 <무호마쓰의 일생>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되어 평가를 받았다.
전후의 일본 영화계에서 활약한 감독으로는 <라쇼몬(羅生門)> <7인의 사무라이> 등의 구로자와, <만춘(晩春)>의 오즈(小津)가 있고, 60년대 이후에는 <원폭의 아들> <벌거벗은 섬>의 신토(新藤兼人), <인간의 조건> <괴담(怪談)>의 고바야시(小林正樹), <미얀마의 수금(竪琴)>의 이치가와(市川崑) 등 당시 40세를 넘는 중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누벨 바그라고 하는 오시마(大島渚), 이마무라(今村昌平), 나카히라(中平康) 등이 활약하였다.
일본영화는 그 밖에도 멜로드라마, 전쟁 스펙터클, 무사영화(武士映畵), 청춘영화, 코미디 등 여러 측면의 오락영화와 특히 핑크영화가 범람하는 등 한때 연간 600편을 상회하다가 1956년엔 516편, 1970년엔 423편으로 줄었다. 5대제작회사의 붕괴가 현저해지기 시작한 현상은 대자본에 의한 영화생산이 점차 줄게 되면서 군소(群小) 독립프로덕션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