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역사적 예수(歷史的 - , 독일어: Jesus von Nazaret, 영어: historical Jesus)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나사렛의 예수에 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상은 계몽된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상을 찾자"고 하여 신앙과 분리되어 예수에 관한 역사비평 방법(critical historical methods)을 사용한 연구 주제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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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논구 운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박사 학위 논문인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독일어: 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영어: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From Reimarus to Wrede: a History of Life-of-Jesus Research)가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근대 서구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던 17-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역사비평주의 영향으로 등장하였다.[2] '교리적 그리스도'가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 신조 또는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으로 해석한 기독교 교리적 그리스도라면, '역사적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인물로서 예수의 삶을 주목하여 바라본 예수를 말한다. 다시 말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연구다. 이러한 재구성은 그의 생애에 관한 1차 사료인 복음서 본문에 대한 성서 비평적 분석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가 살았던 당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연구하고 있다.[3]
신약성경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식민지였던 갈릴리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고장에서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유대인으로 제2성전 시대 후기 유대교에 메시아적이고 묵시적인 기대가 있던 시기에 살았다.[4][5] 예수는 세례 요한이 처형 당한 이후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자 자율적인 윤리 교사"로 보일 수 있는 행동으로 2-3년간 활동하였다.[6] 예수는 놀랍고 독창적인 비유를 말했고, 그 가운데 많은 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7] 이후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환전상과 제물로 쓰일 비둘기 등의 동물과 판매상을 쫓아내는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켰다.[8] 이때는 유월절로 예루살렘에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이 고조된 시기였다.[8] 예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에 대해 매우 옳지 않다고 여겼으며, 특별히 유대인의 제사장들의 이중적인 태도인 사람들 앞에서는 의를 행하려고 하고, 하나님앞에서 의롭지 못한 태도,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이 갖고온 성전 예물은 기뻐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멸시와 조롱과 율법을 이용하여 정죄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앞에 바르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특히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들에게 치유를 행하거나,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줏는 일까지 쫒아다니며 비난했으며, 예수가 죽은자를 살리는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하여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모두 예수와 제자들을 쫒아 다니자, 유대의 율법을 통해 유대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제사장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것을 두려워하였다. 유대 민족을 지배하던 율법에 매여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가 전한 메시지를 통해, 그들의 사회를 억압하는 잘못된 서기관들의 메시지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 두려워진 율법 학자들과 제사장들은 예수가 전한 메시지를 이용하여 그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성전 제사를 제일로 삼았던 제사장들에게 예수가 전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라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고소 거리로 제공되어 졌다. 대 제사장과 공회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거짓증인을 이용하여, 예수를 고소하는데 앞장 섰으며, 결국 그들은 유다의 배신에 의해 은 30냥에 팔린 예수를 그 당시 유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다스렸던 5대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데려가고,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을 당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여러번 유대인들에게 사면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간악한 유대인들과 제사장들과 무리들은 합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강요했다. 무리의 동요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 릴것을 두려워한 당시 유대 총독(soldiers of the governor)이었던 본디오 빌라도(Pilate)는 예수를 채찍질하도록 군병에게 지시 하게 되었고, 예수는 당시 유대의 전례에 따라 40대의 태형과 가시 면류관을 쓰게 되었는데, 그 당시 유대 병사들은 살이 찢겨지는 쇠 유리가죽으로 만든 가죽 채찍을 이용하여 예수를 매질 하였고 그들은 예수의 몸에 홍포를 입혀 조롱한 후에 다시 빌라도 앞에 세워 유월절 전날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해 총독앞에 세웠다 .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죽는것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고 하자, 빌라도는 예수 에게서 사형을 당할만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유월절의 유대인의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를 석방하고자 관청앞에 모인 유대인 무리들에게 당시의 살인자로 끌려온 바라다와 예수를 세워, 유대인들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자리에 있던 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당시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Pilate)는 민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그들의 요청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게 되었다. 예수는 처형되어 죽은 이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났다. 그러자 예수의 시체를 찾지 못한 대 제사장과 장로들은 부활한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병사들에게 퍼뜨리도록 돈으로 매수 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살아난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의 제자들이었던 동생 야고보와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했으며,[9] 예수의 시체는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예수 가 이 땅에서 삼년간 그의 제자들과 함께 행했던 사역의 주요한 사건들은 그를 배신한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에 의해 책으로 기록되거나, 전파되어져서 오늘날 온세계 인구의 1/3이 예수가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으며, 이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에 의해 전파된 복음은 유대교에서 분리해 초기 기독교로 발전되어 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