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중세에 성직자의 임명권을 두고 교황과 세속 군주 간에 일어난 분쟁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서임권 투쟁(Investiture Controversy)이란 세속 군주가 관행적으로 행사해 오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을 교회가 되찾아 오는 과정에서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벌어진 일련의 권력투쟁 사건을 말한다. 가장 격렬히 다투었던 자들은 11세기에 독일왕 하인리히 4세와 하인리히 5세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다툰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외에 다수의 로마 교황들이다. 부패한 교회의 개혁차원에서 진행된 사건으로 약 50년간 이어진 투쟁은 독일내 여러차례에 걸쳐 내전을 초래했다. 서임권 투쟁은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일단락되며 타협점을 찾은 결과 황제권은 약화되고 교황권은 상승하여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때는 그 힘이 절정에 도달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다.[1]
서임권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권한이었으나 중세 전반기 교회가 세속 군주의 도움과 보호를 받으며 종속관계가 형성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세속 군주가 행사하게 되었고, 이를 권력 남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2] 그러나 10세기에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추악한 수준에 도달하며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흐름이 수도원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에서도 있었다. 개혁파 성직자들은 교회 부패의 주요 원인을 속권의 서임관행, 성직자 결혼, 성직매매로 보았고[3] 그중에 가장 큰 원인은 교회에 대해 부당한 간섭을 야기하고 있는 속권의 서임관행이라 판단했다. 서임권은 세속군주의 중요 권력 기반으로, 자신의 측근이나 친인척들을 임명하였는데 무자격자를 고위 성직자로 임명함에 따라 교회가 혼탁해지고 유력 귀족 가문 간에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임권 투쟁중에 벌어진 주요한 사건으로는 카노사의 굴욕(1077년)과 보름스 협약(1122년)이 있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내 권력 장악력이 약함으로 인해 카노사 성에서 굴욕을 겪기는 했으나 파문 해제 이후 권력을 장악하였고 1084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상대로한 복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독일 내 황제의 권력은 중앙집권을 꺼리는 귀족들 때문에 여전히 불안했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에 이르러 보름스 협약을 맺으며 서임권 투쟁은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서임권 투쟁이 보름스 협약(1122년)으로 일단락 되기는 했으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진 것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만 기존에 일방적으로 황제가 행사하던 서임권의 핵심부분을 교회가 가져오게 됨으로 황제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신정정치적 주장이 철회되었고[4] 권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무자격자가 성직에 임명되던 악습이 개선되면서 성직 임명 기준이 크게 향상되었다.[5] 이 사건의 여파는 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며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걷게 될 전 역사과정의 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6] 보름스 협약 체결 후에도 이탈리아는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구엘프)로 나뉘어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갈등하고 대립하였다.